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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 칠천량 해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0555
한자 忠淸水營 漆川梁 海戰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문광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7년 7월 15일연표보기 - 충청수영 칠천량 해전 발발

[정의]

1597년 7월 15일 보령 충청수영 소속의 충청수군이 원균의 지휘 아래 칠천량에서 싸운 전투.

[개설]

임진왜란 중 명(明)과 일본의 화의(和議)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선조 30)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하였다[정유재란]. 당시 이순신(李舜臣)[1545~1598]은 모함으로 하옥되었고, 원균(元均)[1540~1597]이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로 있었다. 원균이 충청도·경상도·전라도 3도의 수군을 통제하면서 충청수군도 한산진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산진에는 충청수군의 지휘관 최호(崔湖)를 비롯하여 수군우후(水軍虞候) 원유남(元裕男), 서천군수(舒川郡守) 안괄(安适) 등이 있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따르면 이들은 백의종군하고 있던 이순신에게 한산진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이를 통해 보면, 1594년(선조 27) 3월부터 수군우후 원유남을 비롯하여 결성·소근포·마량·서천포·비인·안흥·서천 소속 수군은 줄곧 한산진에 주둔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596년(선조 29) 11월 충청수사(忠淸水使)의 한산진 배치가 결정되면서 충청수사 최호가 합류하였고, 충청수군은 칠천량 해전에 참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원균이 한산진의 충청도·경상도·전라도 3도의 수군을 지휘하면서 부대 결속력에 문제가 생겼다. 수군 장수들은 불만을 제기하였고 배반하는 장졸들이 나타났다. 일본군은 첩자를 통해 조선군의 내부 사정을 염탐하고, 조선 수군을 섬멸할 기회로 삼았다. 일본군은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고자 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1537~1599]은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1547~1634]과 상의하여 원균에게 출전 명령을 내렸고, 1597년 5월 전선 134척. 도착하지 않은 전선 5~6척, 건조 중인 전선 48척 등 총 180여 척의 전선과 격군 13,200여 명에게 전투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원균은 출전 명령을 거부하다가 6월 18일 부산 앞바다로 출전하였다. 6월 19일 조선 수군은 안골포에서 일본 군선 2척을 빼앗고, 가덕도에서도 일본 군선 여러 척을 포획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역습을 받아 평산만호 김축(金軸)이 총상을 입고,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이 전사하는 등의 피해를 입고 후퇴하였다.

7월 8일 두 번째 출전에서 원균은 일본 군선 1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철군 과정에서 조선의 일부 전선(戰船)은 풍랑으로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던 울산 서생포로 표류하게 되었고, 일본군에게 공격을 당하여 전멸하였다. 이후 도원수 권율은 원균에게 곤장을 치며 출전할 것을 명하였고, 원균은 삼도수군을 모두 이끌고 출동하였다.

7월 14일 부산 앞바다에서 원균은 일본군과 전투를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이 이를 회피하자 풍랑으로 인해 가덕도로 회항하였다. 원균은 물을 구하기 위해 부산 가덕도에 상륙하였는데, 이때 매복한 일본군의 습격으로 4백여 명이 사망하고 퇴각하였다. 원균은 거제도 북단의 영등포로 퇴각하면서도 매복한 일본군에게 공격을 당하였고, 수군을 결집하고 응전하기 위해 칠천량으로 이동하였다.

[경과]

충청수군은 원균의 지휘를 받아 참전하였으나 일본군의 매복 공격으로 피해를 입었다. 이후 칠천량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대패하면서 충청수사 최호를 비롯한 대부분의 병력이 전멸하였다. 충청수군은 칠천량 해전으로 인해 태안군수 이광영(李光英) 등을 제외한 병력 대부분이 전멸하는 궤멸적인 타격을 받았다.

[결과]

원균은 칠천량에 병력을 결집하고 일본군에게 반격하려 하였으나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하였다. 일본군의 공격에 조선군은 응전하였지만 대부분의 전선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었다. 통제사 원균과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 등 조선 수군의 핵심 지휘관이 전사하였고, 충청수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으로 조선 정부는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고, 충청수사에 권준(權俊)을 임명하였다.

[의의와 평가]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조선은 충청수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수군 병력이 전멸하였다. 이로 인해 조선은 남해안의 제해권(制海權)을 잃었으며, 1597년 명량해전(鳴梁海戰) 이전까지 전세(戰勢)가 일본으로 기울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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