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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801293
한자 統一新羅 聖住山門 聖住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충청남도 보령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정성권

[정의]

충청남도 보령 지역에 신라 하대 선종계의 낭혜 무염이 창건한 선종 사찰.

[개설]

신라 하대 선종은 불교계의 새로운 유행이었다. 이 시기에 신라 중대까지 신라 불교계를 풍미해 온 교종이 점차 쇠퇴하고 대신 선종이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중국에서 법을 받고 신라로 돌아온 선승들은 여러 지역에서 선종 사찰을 열어 법을 펴고 있었다. 성주사는 바로 신라 하대 선종계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낭혜(朗慧) 무염(無染)[800~888]이 창건한 선종 사찰이다. 무염은 845년 중국에서 귀국한 후 약 2년이 지나서 충청남도 보령에 성주사(聖住寺)를 개창하였다. 무염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이후 약 2년 뒤에 성주사의 개창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염의 활동 배경]

무염은 23살 때인 822년 12월에 입당하였다. 이후 845년 귀국할 때까지 약 25년 가까이 중국에서 머물렀다. 따라서 무염은 당시 중국에 유학하고 귀국한 선승들 중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러 있었던 선승이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것은 중국 불교계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중국 불교계에서 남다른 위치에 올랐을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 무염이 신라에 돌아온 것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 무종의 폐불정책으로 말미암은 결과였다. 무염에게 있어서는 당연히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무염은 귀국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신라에 돌아오기는 하였어도 무염이 머물 수 있었던 사찰조차 없는 형편이었다.

당시 불교계는 교종이 선종의 도전을 받고 있기는 하였으나 중앙 진골 귀족의 도움으로 아직도 강한 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교종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선종은 교종에 비하여 아직 상대적인 열세에 있었다. 그것은 선종 승려들의 동향에서도 입증된다.

820년대에 귀국한 도의(道義)[?~?]가 환대를 받지 못하고 설악산에 은거하였고, 826년에 귀국한 홍척(洪陟)[?~?]과 830년에 귀국한 쌍계사 진감(眞鑑)선사 혜소(慧昭)[774~850] 등이 왕실로부터 후대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끝내 지방에서의 활동으로 시종하고 말았다는 사실이 그러한 사정을 일러주고 있다. 837년 귀국한 현욱(玄昱)[788~869]도 혜목산 고달사에 머물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840년에 귀국한 체징(體澄)[804~880]도 장흥의 보림사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결국 중국에서 돌아온 대부분의 선승들이 중앙에 머물지 못하고 지방으로 나가게 되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에서는 교종 세력이 강력하여 선종이 자리 잡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염은 귀국하여 경주로 들어갔다. 아마도 무염은 경주에서 여러 측면으로 자신을 후원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후원으로 자신이 거처하며 법을 펼 수 있는 절을 마련하는 일이 가장 급선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염은 귀국하여 국인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정작 그를 실질적으로 후원해 줄 수 있는 경주의 귀족들로부터는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경주의 귀족들이 아직도 선종보다는 교종을 선호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무염이 그 이전의 선종 승려인 도의나 홍척, 그리고 혜소 등과 같이 경주를 떠나 지방에서 법을 펼 곳을 찾게 된 것은 바로 당시의 사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염의 활동과 성주사 창건 과정]

경주를 떠난 무염은 소백산에서 김흔(金昕)[803~849]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김흔은 그에게 웅천주의 한 절에 주석(駐錫)[승려가 포교하기 위하여 어떤 지역에 한동안 머무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무염과 김흔은 일찍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 무염이 당 유학을 위해 당은포에서 조정사(朝正使)인 김흔을 만나 그로부터 당으로 가는 배의 승선을 허락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무염이 북쪽[소백산]으로 길을 잡고 나선 것은 바로 김흔을 염두에 둔 행보로 이해된다. 두 사람이 모두 무열왕의 후손이라는 혈연적인 관계까지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경주에 머물면서 단월(檀越)[자비심으로 조건 없이 절이나 승려에게 물건을 베풀어 주는 일]을 구하지 못한 무염은 그 대상자로 김흔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김흔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소백산에 은거하고 있었다. 무염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자신이 거처할 곳을 마련하는 것이었으며, 김흔을 찾아간 무염은 그로부터 웅천주 부근에 있는 허물어진 사찰에 주석해 줄 것을 부탁 받았다.

무염성주사를 창건한 것은 소백산에서 김흔을 만난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무염은 대중(大中)[847~859] 초에 성주사에 머물렀는데 소백산에서 김흔을 만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 사이에 무염은 김흔 이외에 성주사를 개창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후원자가 되는 김양(金陽)[808~857]을 만났다. 따라서 성주사 개창에는 김흔 이외에도 김양이 중요한 단월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김양과 김흔은 종형제 사이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대립적인 관계였다. 이들은 서로 정적(政敵)이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김양이 바로 김흔을 정치적으로 몰락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양이 성주사 개창의 커다란 후원자였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더구나 당시 성주사의 전신인 오합사가 김흔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더욱 그러하다.

무염성주사를 개창할 때 김양은 가장 큰 후원자가 되었다. 이것은 김양이 자의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김양이 성주사 창건에 적극적인 후원자가 된 것은 무염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두 사람의 만남이 직접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무염과 김흔이 만난 이후부터 성주사를 개창하기 이전의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무염이 김흔과 정적 관계에 있던 김양에게 자신의 후원을 요청한 이유는 오합사가 김인문(金仁問)[629~694]의 원당이었다는 것과 그것이 김흔의 관리 하에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합사가 김흔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는 것은 김인문계에서 김주원계로 이어지는 정통성이 김흔에게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비록 허물어져 가는 사찰이었으나 무염을 그곳의 주지로 임명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이 점은 김주원계 내에서 김양보다 김흔의 위상이 훨씬 더 높았음을 시사한다. 김흔이 비록 정치적으로는 몰락하였다고 하더라도 김주원계 후손들에게는 아직도 정신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김양은 김흔을 몰락시키고 정치적으로 등장하였으며, 장보고(張保皐)[?~846]가 왕실에 대하여 불만을 품자 그를 제거한 사건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즉, 김양은 장보고 암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으며 장보고의 딸 대신에 그의 딸을 문성왕의 비로 들어앉혀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기반을 탄탄히 하고자 하였다. 특히 김주원계라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라도 김양은 왕실과 통혼을 꾀하였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시중직에 올랐으며 그것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높은 지위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그렇지만 김양의 정치적인 지위는 한결같을 수가 없었다. 당시 상대등이었던 의정(誼靖)[후에 헌안왕]의 계속되는 견제가 그의 정치적인 지위를 매우 불안하게 하였던 것이다. 결국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었던 김양은 신무왕이 왕위에 오을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공신이자 그의 딸이 문성왕의 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기반이 굳건한 편이었다고 보기 힘든 면이 있다.

무염은 이러한 처지에 있던 김양에게 정치적 기반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 방법으로 가장 효과적인 것 가운데 하나는 당시 김양과 김흔의 정치적 대립으로 분열되어 가고 있던 김주원계 세력을 결집시키고 김양으로 하여금 그 구심점이 되게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김인문의 원당이었던 오합사를 중창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주원계 후손들에게 있어 김인문은 각별한 존재였다. 그는 김주원계 후손들의 정신적인 구심체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이곳은 김양보다는 김흔의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치고 있었으나 김흔은 거대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오합사가 당시 반쯤은 불에 탄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이를 말해 준다.

오합사에 주석해 달라는 김흔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무염에게는 좀 더 실제적인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월이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양의 경제적 도움으로 오합사를 중창하여 성주사로 새롭게 개창하였다. 이를 통해 새롭게 개창된 성주사에 대한 김양의 영향력이 커지고 아울러 김주원계의 세력이 그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시키는 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 창건에서 김양은 최대의 후원자가 되었고, 이후 성주사의 사세가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곧 무염의 의도가 크게 성공을 거두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김흔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성주사에 김양의 영향력이 크게 미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양은 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된 것으로는 김양이 성주사에 시납하는 과정에서 토지가 아닌 조도(租稻)를 주었다는 점이다. 조도의 시납은 매년 시납자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년 시납하는 조도의 양이나 심지어는 시납 여부까지도 시납자의 권한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조도의 시납이 계속되는 한 그 절은 사실상 시납자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는 김양이 치밀하게 계산한 결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그러한 방법을 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와 무염의 만남과 결연은 애초부터 종교적인 것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먼, 서로의 현실적인 정치적, 경제적 이해의 결과였기 때문일 것이다.

김흔과 김양이라는 중앙의 진골 귀족이 큰 시주자가 되어 성주사는 새롭게 개창되었다. 성주사의 개창에는 그 중심에 무염이 있었으며, 무염과 김흔, 김양 모두 무열왕계 후손이라는 점이 성주사 개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성주사의 유적 현황]

성주사는 선종 사찰로 크게 개창되었으나 성주사에서 참선만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김립지가 찬술한 『성주사비편』에 의하면 장육세존상(丈六世尊像)을 조상하였고, 조사당, 금전(金殿) 등이 건립되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의례가 거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성주사에는 3층석탑 3기와 5층석탑 1기가 있다. 그런데 석탑은 김립지가 찬술한 『성주사비편』에 의하면 무구정석탑(無垢淨石塔)이라고 되어 있다.

무구정석탑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을 탑 안에 안치한 석탑을 말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는 망자에 대한 추복(追福)과 정토왕생,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부르는 것, 병의 치료, 장수 등 다양한 공덕을 설하고 있으며 공덕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다라니의 서사와 소탑 제작과 같은 구체적인 방식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서 탑 신앙과 관련한 다라니를 설하는 점 때문에, 인쇄와 필사 등을 통해 탑 안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8세기 초 황복사 탑 안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안치한 이후 경의 내용에 따라 석탑을 조성하는 예가 다수 나타난다. 그러나 중국이나 일본에서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다. 반면, 신라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즉각적으로 수용하여 적극적으로 확대, 발전시켰다는 특징이 있다. 성주사지 석탑이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관련된 석탑이라는 점을 통해 통해 성주산문의 사상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성주사에 세워진 무구정석탑은 밀교적 정토신앙과 관련이 있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한 것이다. 신라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한 무구정석탑이 건립된 것은 신라 중대부터이다. 황복사 삼층석탑과 불국사 석가탑 외에도 석굴암에서 발견된 소석탑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렇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한 조탑은 문성왕 때부터 헌강왕 대에 걸쳐 널리 성행하였다. 이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하여 탑을 세우면 국가의 평안과 국토의 안녕을 기약할 수 있다는 것과 관계가 깊다. 즉, 탑을 세우고 6종 다라니를 써서 탑에 안치하여 공양하고 예배하는 공덕으로 그 지역에는 전쟁과 기근, 횡사, 질병이 없으며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자나 도덕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죽은 사람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었다.

성주사에 건립된 무구정석탑은 이 석탑을 중심으로 종교적 의례가 행해졌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보림사에 세워진 석탑이다. 보림사의 석탑 2기도 헌안왕의 왕생을 빌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성주사에 세워진 무구정석탑도 누군가의 왕생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아마도 성주사의 전신이 김인문을 위한 원찰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주사의 신앙의례에 참석한 신자 및 단월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숭암산 성주사 사적에 의하면, 성주사에는 삼천불전 및 극락전 3칸이 있었다고 한다. 삼천불전은 고려 중엽의 건물로 파악되었다. 그러나 성주사의 전신이 김인문의 봉토에 세워졌고 그 절에 승려들이 추선(追善)[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려고 공덕을 회향함]을 위해 머물렀으므로 극락전이 성주사 개창을 전후한 시기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무염의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 법장이 준 십계(十戒)로 태교를 행하였는데, 법장은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 수행하던 때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가 화엄을 수학한 부석사와 지상사에서 아미타신앙이 행해지고 있었으며, 중국에서 그가 머문 산서성 일대에서 아미타신앙이 성행하였다.

성주산문 출신인 법경현휘와 대경여엄의 아미타신앙을 감안하면 무염의 아미타신앙도 인정될 수 있다. 무염의 아미타신앙은 성주산문이 크게 번창했던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선종 사찰인 성주사에서 아미타신앙 등의 신앙의례가 행해지던 사상적 근거는 모든 사람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무염이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의 차이를 인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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