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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29
한자 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산3-1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최범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211년 - 김구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278년 - 김구 사망
조성 시기/일시 1278년연표보기 -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조성
문화재 지정 일시 2009년 10월 23일연표보기 -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일원 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 지정
현 소재지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일원 -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산3-1지도보기
성격 무덤|묘역
양식 봉토분
관련 인물 김구(金坵)
소유자 부안 김씨 문중
관리자 부안 김씨 문중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

[정의]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지포 김구의 묘역.

[개설]

김구(金坵)[1211~1278]는 고려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부안[부령(扶寧)],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김정(金挺)이고,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초명은 백일(百鎰)인데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17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였고, 22세인 1233년(고종 20)에 과거[春官]에 응시하여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정원부 사록(定遠府司錄)과 제주 판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원종 때 유경(柳璥)의 천거로 예부 시랑(禮部侍郞)이 되었고,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북정록(北征錄)』을 지었다. 1263년(원종 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이어 정당문학(政堂文學)·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등을 역임하였다.

몽골 침입 시에는 탁월한 지략과 화려한 변려문체(騈儷文體)의 표문(表文)으로 이를 막아 냈으며, 원나라 최고의 문장가 왕악이 감탄할 정도로 문장 실력이 뛰어났다. 1274년(원종 15)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 참문학사(參文學事),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역임하였다. 당시 역관들이 간계를 부려 통역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리를 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자, 통문관(通文館) 설치를 건의하여 궁중의 학관(學館) 가운데 젊은 인재들에게 한어(漢語)를 가르쳐 역관으로 양성하였다. 이장용(李藏用)·유경 등과 함께 신종·희종·강종 3대의 실록을 찬수하였고, 충렬왕(忠烈王) 때 『고종실록(高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원나라에 갔을 때 남긴 『북정록(北征錄)』과 충렬왕의 『용루집(龍樓集)』에 김구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문집으로 『지포집(止浦集)』이 있다. 1534년(중종 29)에 부안 도동서원(道東書院)에 배향하였다.

[위치]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일원(止浦金坵先生墓域一圓)부안군 변산면 운산리 지지포 산3-1번지에 있다. 김구의 묘는 부안군 변산면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2㎞가량 떨어진 운산마을의 북동쪽 구릉 정상에서 서남 방향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묘역의 동쪽에 부안 김씨(扶安金氏) 재실인 경지재(敬止齋)[부안군 변산면 운산로 169-120]가 자리하며, 경지재 남서쪽에 있는 신도비각 안에 김구 선생 신도비가 있다. 묘역에서 남쪽으로 1㎞ 남짓 떨어진 지점인 운산마을 입구에는 ‘부령김문정공묘동(扶寧金文貞公墓洞)’이라는 묘역 입구 안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변천]

김구가 사망한 1278년(충렬왕 4)에 조성하였다.

[형태]

남동쪽으로 석축을 쌓았고 그 위에 철책을 둘렀으며, 동쪽에는 묘역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다. 봉분 뒤에 곡장(曲牆)이 둘러쳐 있고, 봉분 아래에는 상석과 좌우에 묘비가 있으며, 서남방에는 제단이 있다. 전면에는 양과 문인석상(文人石像), 망주석이 각각 마주 보고 있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장방형으로 조성된 묘역의 중앙에 자리한 묘는 봉분의 직경이 7m 내외로서, 하단부에 20㎝~30㎝ 크기의 판석형 석재로 호석을 둘러놓았으며, 전면은 난간을 시설해 놓았다. 묘를 중심으로 전면에 석상과 향로석, 비석, 석양, 석인상[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의 석조물이 있고 후면에는 토지 신위의 제단이 있다.

한 쌍의 문인석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거의 비슷한 형태로 조각하였다. 대체적으로 사각주에 가까운 석재에 조각하여 양감은 떨어진다. 머리에는 금관을 쓴 것으로 판단되며, 어깨가 귀 아래까지 올라붙어 목이 표현되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형태이다. 얼굴에서 눈과 코는 비교적 큰 형태를 보이며, 입술을 두툼하게 표현하였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홀을 쥐고 있는 표현이지만 선명하지 않다. 조복의 넓은 소매는 무릎 아래에까지 드리워져 있다. 한 쌍의 망주석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데, 상부 장식으로부터 기단까지 1매석으로 이루어졌다. 맨 위에는 보주형에 가까운 둥근 머리를 올렸으며, 아래에는 앙련(仰蓮)을 문양 장식 없이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는 받침이 있다. 그 아래에 2단의 팔각기둥과 함께 팔각의 지대석을 조각하였다. 토지 신단석과 제단 앞의 향로 받침석은 문인석과 같은 시기의 석물로 판단된다. 묘 북쪽의 토지 신단석은 상석과 향로 받침석이 남아 있는데, 상석 전면에 ‘토지 신위’라는 명문이 있다.

[금석문]

광정대부 첨의시랑찬성사 보문서 대학사 동수국사 판문한서사 김구 묘지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본(本)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문(文)이 없으면 행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대개 충신(忠信)이 □[本?]이고, 의리(義理)가 문이다. 충성과 신의의 □[本?]이 의리의 문에서 행해지는 것을 내가 문정공(文貞公)에게서 보았다.

공의 이름은 구(坵)이고, 옛 이름은 백일(百鎰)이며, 자는 차산(次山)으로, 부령현(扶寧縣) 사람이다. 아버지 정(挺)은 □□ 예전의 이름난 선비인데, 지후(祗侯)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부인 김씨(夫人金氏)로 □□의 딸이다.

공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서는 글을 잘 지었다. 17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하고, 22세에 과거[春官]에 응시하여 을과(乙科) 제2인으로 급제하였다. 급제할 때의 좌주(座主)는 김정숙공(金貞肅公)[김인경(金仁鏡)]이었는데, 그 또한 제2인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이에 의발(衣鉢)을 전해 준 옛일을 말해 주면서 더욱 총애하였다. □계[□啓]를 바쳐서 사례하니 지금까지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의 귀감이 되고 있다. 병신년[고종 23년, 1236년]에 탐라(耽羅)의 수령이 되어 나갔는데, 청렴하고 명민함으로 칭송받았다. 임기가 차자 서울로 돌아와 서장관(書狀官)에 충당되어 북국(北國)[원(元)]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매우 이름을 □ 날렸다. 신축년[고종 28년, 1241년] 가을에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들어갔으며, 6년 동안 세 번을 옮겼지만 귀에 방울끈[鈴索]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시문과 상소문[詞疎]은 구름처럼 빼어났는데, □이 나면 더욱 훌륭하였다.

정미년[고종 34년, 1247년] 여름에 임시로 횡반(橫班)에 보임되었다. 이해부터 해마다 승진하여 3품에 이르렀는데, 역임한 것은 모두 청요직이었다. 일찍이 외관으로 나간 적이 없으니, 진실로 대문장가였으므로 하루라도 잠시 조정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년[원종 10년, 1269년] 겨울에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銀靑光祿大夫文昌左相]에 임명되고, □년에 추원(樞院)에 들어가 좌상시(左常侍)를 겸하였다. 또 이듬해에 금자(金紫)를 더하면서 정당문학이 되고, 참지정사 수대위 중서평장사(叅知政事守大尉中書平章事)를 역임하였다.

지금의 임금 충렬왕이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을해년[충렬왕 1년, 1275년]에 원[大元國]의 조칙을 받들어 관호(官號)를 개정하자, 지금의 관직을 고쳐 받았다. 그 사이에 사마시(司馬試)를 맡고 예부시[春闈]를 주관하였는데, 뽑은 사람들이 모두 이름난 선비였으므로 진신(搢紳)들이 서로 축하하였다. □에 이르러서는 참되게 행동하며, 용모가 깨끗하고 말을 정중하게 하였으며, 사사로운 일에는 서툴렀으나 관직에 임할 때는 민첩하였다. 재상의 지위에 10년 동안 있으면서 사리(私利)를 도모하지 않고, 사직(社稷)을 염려하며 감히 직언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고 사랑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바탕[本]이다.

또 신묘년[고종 18년, 1231년]부터 [원에] 사대(事大)한 이래 농서 문순공(隴西文順公)[이규보(李奎報)]이 대학자로서 천자에게 올리는 상서문[章奏]를 오로지 하였는데, 그 뒤 변고가 어지럽게 발생하여 이 임무가 크게 어려워졌다. 공이 일을 맡으면서 붓을 잡게 되자, 어의(語義)가 모두 절묘하고 설명이 지면(紙面)에서 간곡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에 수천 리 밖에서 보는 사람들도 마치 얼굴을 마주 대고 말하는 것과 같아 오늘의 편안함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것이 공의 문이다.

아, 충신의 본과 의리의 문이 사람의 눈과 귀에 방울소리 같이 울리며 족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어진 후손인 낭관(郞官)이 또 돌에 묘지명을 새겨 영원토록 황천에 전하고자 하여 은근하게 부탁하였다. 내가 낭관과 일찍이 여러 해 동안 함께 지내면서 정호(情好)가 남과 달라서 의리상 감히 거절할 수 없어서, 억지로 글을 쓰지만 매우 부끄럽다.

공은 춘추 68세인 지원(至元) 15년[충렬 4년, 1278년] 9월 26일에 병이 들어 개경[松京] 광리(廣里)의 집에서 돌아가셨다. 임금이 매우 근심하고 탄식하여 □ 부의(賻儀)를 내려 총애를 표하며, 시호를 내리는 뇌서(誄書)를 보내어 애도하였다. 11월 23일 초산(椒山) 기슭에 장례 지내니, 공의 일생[哀榮終始]이 여기에 갖추어졌다.

첫 부인 박씨(朴氏)는 내시령동정(內侍令同正) 박[미기재]의 딸로 공보다 먼저 작고하였다. 딸 한 명을 낳았는데, 지후(祗候) 이[미기재]에게 시집갔다. 후부인(後夫人) 최씨(崔氏)는 예빈경(禮賓卿)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은퇴한 최[미기재]의 딸로, 3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약관(弱冠)에 과거에 급제하여 완산목부사(完山牧副使)가 되었고, 장녀는 보문서교감랑(寶文署校勘郞)에게 시집갔으며, 2남[종화(宗盉)]은 수창궁녹사(壽昌宮錄事)인데 아직 결혼하지 않고 대부인을 모시고 있다. 막내[충장(冲壯)]는 머리를 깎고 조계종의 승려인 안화 대선사(安和大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무릇 이와 같이 상(喪)을 치르면서 마음을 다하였으되 다만 몸은 상하지 않았으니, 아, 효성스럽도다. 대저 공의 덕행과 문장의 아름다움, 벼슬을 역임하며 보여 준 재능의 상세한 내용 및 가세(家世)의 훌륭함은 정적(政籍)과 가첩(家諜)과 시호를 내려 주는 뇌서[諡誄]와 사서(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세세하게 적지 않고, 다만 돌아가신 날과 장례를 지낸 때 및 집안의 자녀의 수를 덧붙이기로 한다. 말이 법도에 어긋났다고 꾸짖음이 없기를 바란다.

명(銘)한다.

봉(鳳)새의 깃털과 용의 비늘 같으니,

그 문장을 아름답게 말하자면 청천백일(靑天白日)로도 가히 칭송할 수 없고

그 관작을 서술하고자 한다면 □당[玉堂?]과 황각(黃閣)[재부(宰府)]으로 일관하였다.

수명이 70세[縱心]도 되지 못하고 꺾였으나 돈독한 의리는 자신도 돌아보지 않았도다.

대개 그 덕을 명(銘)으로 적었으니 무궁토록 전해지리라.

지원(至元) 15년 무인년[충렬왕 4년, 1278년] 11월 일 쓰다.

[匡靖大夫簽議侍郎賛成事寶文署大學士同修國史判文翰署事金坵墓誌

礼云無本不立無文不行盖無信□也義理文也□ 諸忠信之□行乎義理之文者吾於文貞公見

之矣 公諱坵舊名百鎰字次山扶寧縣人父諱挺□□古名儒終于祗侯母夫人金氏

□□女 公生而敏悟□長善屬文年十七中成均試二十二擧春官擢乙科第二人及第時座主金

貞肅公亦是第二人因語傳衣鉢古事大加寵進長啓以謝之至今爲四六牙龜歲丙申出倅耽羅

以廉明稱秩滿還京充書狀官使北甚□延譽至辛丑秋入直翰林院三遷六年之間耳不聆鈴索之

聲詞疏雲秀出興益奇丁未夏權補橫班自此年除遷歲至于三品□歷悉是淸華而未甞出外良

以大手筆不可一日暫離於朝廷故也己巳冬授銀靑光祿大夫文昌左相□年入樞院兼左常侍又明年加

金紫爲政堂文學歷拜叅知政事守大尉中書平章事 今上卽祚二年乙亥奉 大元國詔勅改定官號

換授今職其間掌衡司馬主席春闈所薦皆名士搢紳相賀至如□眞行潔貌厚言沉拙於私敏於官相

位十年不以自營爲計憂在祉稷敢言無所避而人盡愛敬此公之本也又自辛卯事大以來隴西文

順公以巨儒擅章奏厥後變故紛出是任大難 公觸事下筆語義俱妙巧說所未到曲形于紙使數

千里外之見者如對面言以致今日之安此 公之文也噫忠信之本義理之文鏘鏘在人耳目足

爲不杇而賢嗣郎官又欲銘于石以壽泉臺之傳請囑勤勤予與郎官甞數年同質于

此情好不渝義不敢拒勉强以書然甚慚 公春秋六十有八至元十五年九月二十六日寢疾

卒于松京廣里之私第 上深不遺之歎下□將斯之悲贈賻以寵之諡誄以傷之以十

一月二十三日葬于椒山之麓哀榮終始□是乎偹矣先娵朴氏內侍令同正朴 之女

先公沒有一女適祗侯李 後夫人崔氏禮賓卿致仕崔 之女有三男一女長曰□弱冠登科見爲

宗山牧副使一女適寶文署校勘郎 仲男壽昌宮錄事未有室侍大夫人季則落髮

依曹溪師安和大禪師凢是持喪盡情唯不至毁滅嗚呼孝矣哉若夫

公之德 行文章之美官資揚歷之詳与夫家世之懿有政籍有家諜

有諡誄有史家此不細備姑記其卒之日葬之時附以闈庭子女之數期不失詰法尔

銘曰

羽之鳳 鱗之龍 欲美其文章則靑天白日不可譽 欲叙其官爵則□堂黃閣始

而終 壽將縱心

義篤匪躬 盍銘厥德 傳之無窮

至元十五年戊寅十一月 誌]

[출전: 『역주 고려 묘지명 집성』하[2001]]

[현황]

지포 김구 선생 묘역 일원은 2009년 10월 23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127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안 김씨 문중이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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