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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정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000571
한자 東萊鄭氏
영어공식명칭 Dongrae Jeongssi|Dongrae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부안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원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본관 동래 - 부산광역시 동래구
입향지 동래 정씨 입향지 -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평교리지도보기|변산면 대항리지도보기|마포리지도보기|보안면 우동리지도보기|상서면 장동리지도보기|줄포면 난산리지도보기|하서면 청호리지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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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시조 정회문(鄭繪文)
입향 시조 정한용(鄭漢容)|정찬용(鄭燦容)|정인환(鄭寅煥)

[정의]

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정한용·정찬용·정인환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부안군의 세거 성씨.

[연원]

우리나라 정씨(鄭氏)는 대부분 신라 6부촌의 진지 촌장(珍支村長) 지백호(智伯虎)의 후손이다. 신라 유리왕(儒理王) 때 지백호가 정씨로 사성(賜姓)을 받은 것이 시작이다. 그러나 세계(世系)가 전해지지 않아 신라 경애왕(景哀王) 때 병부 상서를 지낸 정완(鄭玩)의 아들 정회문(鄭繪文)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정회문 이후 몇 대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전기 보윤 호장(甫尹戶長)을 지낸 후손 정지원(鄭之遠)을 1세로 한다.

정지원의 손자 정목(鄭穆)은 좌복야(左僕射)를 지냈고, 정목의 아들 문안공(文安公) 정항(鄭沆)은 문종(文宗)~인종(仁宗) 연간에 양광도, 충청도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으며, 정항의 아들 정서(鄭敍)는 고려 인종과 동서지간이었다. 내시랑중(內侍郞中)을 지냈고, 문화와 묵죽화에 능하여 인종의 총애를 받았으나 모함을 받아 고향인 동래로 귀향을 가서 소명을 기다리며 연군의 정을 노래로 읊은 것이 유명한 「정과정곡(鄭瓜亭曲)」이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정지원의 5세손 정보(鄭輔)를 파조로 하는 교서랑공파(校書郞公派)와 정필(鄭弼)을 파조로 하는 첨사공파(詹事公派)의 두 파로 대별된다. 두 파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여러 파로 나뉘었는데, 첨사공파 중에서도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와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가 주축을 이룬다.

직제학공파의 파조는 조선 세종(世宗) 때 직제학을 지낸 정사(鄭賜)로 아들 다섯 명을 두었다. 그 가운데 셋째 아들 정난종(鄭蘭宗)은 세조(世祖)~성종(成宗) 연간에 이조 판서와 우참찬을 지냈다. 동래 정씨 중흥조(中興祖)라 할 수 있는데, 문익공파(文翼公派)로 불리는 정광필(鄭光弼)은 정난종의 둘째 아들이다.

동래 정씨가 정광필에서부터 고종(高宗) 대까지 400년 동안 고관대작을 배출한 것은, 사색당쟁(四色黨爭)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중도를 걸었기 때문에 당쟁으로 화를 입은 일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호남 전주를 중심으로 세거했던 대호군파 후손으로 선조(宣祖) 때 우의정을 지냈던 정언신(鄭彦信)의 조카뻘 되는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일으켜, 정언신을 비롯하여 관직에 있던 동래 정씨는 물론이고 정여립과 친교를 맺었던 모두가 화를 입어 이후 호남의 동래 정씨는 한때 몰락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입향 경위]

동래 정씨가 부안 지역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정한용(鄭漢容)이 벼슬을 버리고 변산면 대항리 자미동에 정착한 후 그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보안면 우동리 만화동에는 전라남도 장성에서 정찬용(鄭燦容)이 들어왔고, 하서면 청호리에는 정광필의 후손인 정인환(鄭寅煥)이 들어왔으며, 백산면 평교리에는 대호군파 후손들이 오래전부터 들어와 세거하고 있다. 이밖에도 상서면 장동리, 줄포면 난산리, 변산면 마포리 등지에 동래 정씨가 들어와서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황]

2015년 인구 주택 총조사에 따르면 부안군 전역에서 동래 정씨 793명이 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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