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087
한자 全義李氏
영어의미역 Jeonui Yi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삼정자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태성

[정의]

이도를 시조로 하고 이옥성을 입향조로 하는 창원시 세거 성씨.

[연원]

전의 이씨의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인 태사(太師) 이도(李棹)이며, 그 후손들의 계대는 몇 대 동안 불분명하다. 그러나 고려 후기 최해(崔瀣)가 찬(撰)한 문의공(文義公) 이언충(李彦沖)의 묘지명이 『동문선(東文選)』에 기록되어 있고, 그 비석이 묘지 옆에 묻혀 있다가 발굴되어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되면서 전의 이씨임이 확인되어, 그 조부부터의 계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의 이씨이언충효정공(孝靖公) 이정간(李貞幹), 문장공(文莊公) 이혼(李混)의 후손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3대 인맥을 이루었다. 또 7세손인 이천(李仟)은 고려 고종 때의 장군으로 크게 이름을 날렸고, 이혼은 시조 이도의 8세손으로 고려 충선왕 때 첨의정승을 지냈다.

9세손이 이언충이며 10세손인 이익(李翊)이 예안(禮安)으로 분적하여 예안 이씨로 불렸으나, 근래에 다시 전의 이씨와 통합하였다. 이언충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 등 4대에 걸쳐 벼슬한 명신이며 정당 문학, 예문관 대제학 등을 지냈다. 이정간이천의 현손이며 이언충의 재종손으로 세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중추원사에 임명되고 왕으로부터 사연(賜筵) 및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또 죽음에 임박했을 때는 세종이 직접 거동하여 ‘가전충효세수인경(家傳忠孝世守仁敬)’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내려, 이후 전의 이씨는 모두 이 여덟 자를 가훈으로 삼고 있다.

[입향 경위]

전의 이씨 창원 입향조는 17세손으로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옥성(李玉成)으로, 임진왜란 직전 밀양에서 창원으로 이거하였다. 18세손에는 이명호(李明湖)·이명하(李明河)가 있는데, 그 중 이명하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강계 부사를 지내다 현직에서 1592년에 별세하였으나 이후 지금의 동읍 석산리로 이장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석산에서 이휘종(李彙宗)의 아들로 23세손인 이의복(李義福)에 이르러 창원시 의창구 북면 월백리로 이거하였는데, 합포성에서 창원읍으로 창원 향교를 이건하는 데 발의하였다. 24세 이방언(李邦彦)에 6형제를 두어 자손이 번성하자, 철종 대에 일부는 창원 사화로 이거하였다가 나중에 삼정자·내리·정리 등에 분산하여 거주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