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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결핵 요양원을 거쳐간 사람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202912
한자 馬山結核療養院-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창원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재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6년 6월연표보기 - 국립 마산 결핵 요양소 개설
병원 국립 마산 병원 -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로 215[가포동 512-1]지도보기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있는 결핵 전문 의료 기관으로 많은 유명 인사들이 치료를 위해 머물렀던 곳.

[개설]

마산 결핵 요양소의 주요 기능은 결핵 환자의 진료와 임상 연구, 그리고 기타 국가 결핵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요양소는 해방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결핵 퇴치의 요람이었으며, 이곳에 머물렀던 많은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있다. 특히 이곳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 중에는 유명 인사도 있었고, 요양소를 주제로 한 가요와 영화까지 나와 전 국민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요양소의 변천]

일제 강점기인 1941년 가포[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상이 군인 요양소(傷痍軍人療養所)’를 세웠다. 해방이 되자 신마산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제길윤 박사가 마산시 의사회장 위임으로 책임을 맡아 일본인 요양소장으로부터 시설과 인원을 접수하고 운영 책임을 맡아 자치 관리를 하였다. 당시 병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들은 자치 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방으로 중단된 신축 병동 재건에 최선을 다했다. 뿐만 아니라 제길윤 박사와 간부 직원들이 서울로 올라가 해방과 함께 몰려든 귀환 동포 결핵 환자를 수용하기 위한 요양소 확장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상이군인 요양소 건물을 보수하고 일부 건물을 신축하여 1946년 6월 1일 200병상 규모의 ‘국립 마산 결핵 요양소’가 개설하게 되었다. 2002년 대통령령 제17597호에 의거하여 국립 마산 병원으로 개칭하였다

[결핵 치료의 메카, 가포와 마산]

결핵에 대한 변변한 치료약이 없었던 시절, 폐결핵에는 맑은 공기가 최고였다. 때문에 물 좋고 공기 좋기로 유명한 가포 등지의 마산에 결핵 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특히 가포는 일제 시기부터 기후의 좋은 조건과 천혜의 자연 환경을 살려 1941년에 요양소를 만들었다. 요양소가 위치한 곳은 나지막한 부용산 자락 일대로 삼면이 울창한 송림으로 싸여 있고 동쪽으로는 호수와 같이 잔잔한 바다가 위치해 있다. 이후 마산 지역에는 결핵 환자를 위한 시설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6·25 전쟁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도립 마산 병원, 국립 마산 요양소, 마산 교통 요양원 외에 지금의 마산 용마고 교육 시설을 징발해 국립 신생 결핵 요양원, 결핵 전문 제36육군 병원, 공군 결핵 요양소, 진해 해군 병원 결핵 병동 등이 그것이며, 결핵을 전문으로 진료하는 개인 병원도 많이 설립되었다. 이른바 마산은 결핵 치료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요양소에 머물다간 사람들]

결핵은 ‘글쟁이들의 직업병’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문인들이 결핵으로 시달렸다. 마산에도 결핵 때문에 많은 문인들이 거쳐 갔고 글 자취뿐만 아니라 많은 이야기를 남기기도 하였다. 일제 시기 요양하려 마산에 왔던 문인은 나도향·임화(林和)·지하련(池河連) 등이었고, 해방 후에는 권환·이영도·김상옥·구상·김지하 등이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재야 정치인이었던 계훈제, 영화인 최백산 등도 한때 요양원에 머물렀다. 또한 함석헌·김춘수·서정주 등 유명 문인들이 결핵을 매개로 마산을 다녀가기도 했다.

나도향은 가난과 방랑으로 떠돌다 1925년 요양을 위해 마산에 왔고, 3개월 동안 염상섭에 보내는 편지 형식의 단편 소설 『피 묻은 편지 몇 쪽』을 남기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요양소를 거쳐 간 문인으로 임화가 있었다. 그는 무산 계급을 대변하는 문인으로 유명하였다. 임화의 아내는 지하련이었는데, 두 사람은 요양소에서 사랑을 꽃피웠다. 지하련임화를 온갖 정성으로 간병했고, 임화지하련의 애틋한 사랑에 감화되어 결혼하였던 것이다.

유신 체제에 맞서 독재 타도를 외쳤던 김지하는 폐결핵으로 서울 시립 서대문 요양원과 인천 적십자 병원을 거친 후 장편 시 「비어(蜚語)」를 발표하여 체포되었는데, 폐결핵 때문에 기소되지 않고 마산 결핵 병원에 강제 연금되기도 했다. 「이름 모를 소녀」로 1970년대를 풍미하다 요절한 가수 김정호도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요양소에서 꽃핀 사랑, 임화와 지하련]

임화는 1935년 8월 결핵 치료를 위하여 마산에 내려오게 되면서 마산에 살고 있었던 문학도 지하련과 만나게 되었고, 그해 결혼하였다.

지하련은 본명이 이현욱(李現郁)으로 1912년에 태어났다. 임화와 함께 월북하였는데 임화가 1953년 8월 미국의 스파이라는 누명을 쓰고 북한 당국에 의해 처형된 이후 지하련의 행적은 알 수 없다. 1940년 12월에 단편 소설 『결별』이 평론가 백철에 의해 『문장』에 추천되어 등단했다. 지하련이 광복 전에 발표한 작품은 『체향초(滯鄕抄)』·『가을』·『산길』 등이었고, 광복 후의 작품으로는 『도정(道程)』·『광나루』 등이 있다. 이 작품들은 섬세한 필치로 젊은 남녀의 심리를 추적한 것들이다. 삶의 조그마한 파편들 하나하나에 깊은 관심을 보내면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 다소 담담하게까지 느껴지는 유장한 걸음으로 사람들의 미세한 떨림을 짚어 나가고 있다.

광복 후에 발표한 『도정』은 해방 공간에서도 곳곳에서 권모술수가 횡행하고 그것이 사회주의자들의 핵심부까지 파고 들어오는 현실과 그런 현실 앞에 맞서고 고민하는 지식인의 초상이 작가의 날카로운 눈길에 의해 생생하게 포착되어 있다.

임화는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7년 11월 월북했고, 1953년 8월 ‘국가 전복 음모와 반국가 간첩 테러’ 행위에 연루되어 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정권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죽었다.

1927년 처음으로 임화라는 필명을 사용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에 참가했다. 1929년 「유랑」·「혼가」 등의 영화에 주연 배우로 출연했다. 노동자 오누이의 서정성과 투쟁 의식을 조화시켜 독자들에게 감상적인 공감대를 심화시킨 단편 서사시 「우리 오빠와 화로」·「네거리의 순이」 등을 발표해 일약 카프(KAPF) 진영 안에서 일급 시인의 위치에 올랐다. 1935년 5월 카프 해산계를 제출하고 8월 마산으로 내려와 지하련을 만나게 된다. 해방 직후 문화 운동 단체인 조선 문화 건설 중앙 협의회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조선 문학가 동맹을 결성하고, 민족 문학 이론을 정립했다. 1947년 11월 월북하여 1948년 조소(朝蘇) 문화 협회 부위원장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조선 문화 총동맹 부위원장을 지냈다.

[요양소에서 꽃 핀 문화]

1. 대중가요 「산장의 여인」[작사 반야월, 작곡 이재호, 노래 권혜경]

이 노래를 만들게 된 경위는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비롯되었다. 반야월은 6·25 전쟁 직후 고향인 마산에서 위문단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요양소 환자 위문 공연에서 자신의 대표곡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렀는데, 객석 끝자리에서 하얀 옷을 입은 창백한 얼굴의 젊은 여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녀는 병원 건너편 숲 속에 있는 산장 병동에서 요양 중인 폐결핵 환자였다. 이에 반야월은 그녀의 쓸쓸한 모습을 담은 가사를 한 편 남기게 되었다. 뒷날 마산 결핵 요양소에서 요양하기도 했고 결국 한쪽 폐를 잘라내기도 했던 「나그네 설움」·「번지 없는 주막」의 작곡가 이재호가 이 글에 곡을 붙였다. 「산장의 여인」은 이렇게 대중가요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노래는 당시 KBS 전속 가수로 활약하던 권혜경이 불렀다. 권혜경은 이 노래로 인해 인기 가수가 되었다.

「산장의 여인」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세상에 버림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

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풀벌레만 애처로이 밤새워 울고 있네

행운의 별을 보고 속삭이던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어 적막한 이 한밤에

임 뵈올 그날을 생각하며 쓸쓸히 살아가네

2. 영화 「삼천 만의 꽃다발」

요양원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1951년에 나온 이 작품은 촬영 8개월 만에 완성된 16㎜판 영화였다. 이 영화의 줄거리는 6·25 전쟁에 나가 부상을 당해 실명한 자식에게 자기 눈을 빼내 각막 이식으로 광명을 찾게 하여 다시 출전시킨다는 내용이다. 출연진은 당시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조미령, 마산 출신 시인 정진업, 김수돈을 비롯해 이규숙·박영 등이 등장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주로 요양소였고, 앵기밭골의 무학 농원, 육군 군의 학교 등지였다. 이 작품의 연출은 신경균, 촬영은 김찬영이었으며 기획과 연출은 제2육군 병원이 맡았고 마산 결핵 요양소가 후원을 맡기도 하였다.

3. 편지[김지하 시]

벗들

병든 나를 찾지 마라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머물려거든

매화 봉오리

아조아조 향그럽게 머물고

피우려거든

더욱 더 새빨갛게 꽃피워라

동백이여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따뜻한 춘삼월에 만나자 벗들

눈겨울 외로움 속에

맑은 향기로 머물렀다

매운 꽃으로 들에 홀로 피어났다

춘삼월 그 흔한 바람 속에 흐드러져

수월히 만나자 벗들

어렵게 수소문하여

나를 찾지 마라

병든 나를 찾지 마라

펄펄 내리는 눈 속에 갇힌

[지금의 요양소-국립 마산 병원]

과거의 국립 마산 결핵 요양소는 2002년 국립 마산 병원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결핵 전문 의료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국내 최고의 결핵 치료와 결핵 임상 연구를 통한 난치 결핵의 진료 기법을 개발함으로써 국민 보건 향상에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결핵 환자의 진료와 임상 연구, 결핵 합병증의 진료와 연구, 기타 국가 결핵 관련 사업 추진, 결핵 진료 요원의 교육 훈련 및 결핵 예방 교육, 결핵에 관한 대국민 홍보와 계몽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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