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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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廣評省 |
영어공식명칭 | Gwangpyeong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부(전통 시대)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홍승우 |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 도읍하였던 마진과 태봉의 최고 관부.
[개설]
광평성(廣評省)은 904년 마진(摩震)의 건국과 함께 처음 설치되어 태봉(泰封)과 고려 전기 조정에서도 최고 관부로 기능하였다. 광평성에는 수상직인 광치나(匡治奈)를 비롯하여 서사(徐事)와 외서(外書) 등의 관직이 설치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895년 8월 강원도 철원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한 궁예(弓裔)는 896년에 철원성을 도읍으로 삼아 개국하고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국호를 비롯하여 정치조직 및 제도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시기 궁예가 건국한 나라는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궁예 정권의 국가적 면모는 904년 마진 건국 이후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904년에 궁예는 국호를 마진, 연호를 무태(武泰)라고 선포한 뒤 비로소 광평성을 비롯한 중앙 정치기구를 설립하였다.
고려의 최고 수상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이 궁예 정권에서 광평성 소속의 광치나였던 것에 의거하여, 광평성의 성격이 1061년 설치된 고려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동일하였을 것으로 학계에서는 추측하기도 한다. 나아가 궁예가 신라의 관제를 따라 백관을 설치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의 기록을 토대로 신라의 집사성(執事省)과 광평성을 연결시킨다.
광평성이 신라의 집사성 및 고려의 중서문하성과 상통한다고 보는 견해에 따르면 광평성은 호족 혹은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관부로 이해된다. 신라 중대 왕권을 지탱하던 집사부(執事部)가 하대에 들어서면서 진골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사성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에 광평성 또한 궁예 정권을 구성하는 호족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관부였으리라고 본다. 즉, 광평성은 호족연합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중앙 정치조직으로 이해되고 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 궁예전(弓裔傳)에 따르면, 궁예는 광평성을 설치한 뒤 광치나·서사·외서 등의 관원을 두었다고 한다. 같은 기사에 광치나·서사·외서의 지위는 각각 고려 시대의 시중(侍中)·시랑(侍郞)·원외랑(員外郞)에 대응하는 것으로 부기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에는 상서성(尙書省)의 전신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광평성은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최고 관부로 기능하였다. 다만 왕건 즉위 직후 이루어진 관리 임명을 보면 광평성의 직제가 초기와는 상당히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왕건의 즉위조서 반포 이후 광평시중(廣評侍中)·광평시랑(廣評侍郞)·광평낭중(廣評郞中)·광평사(廣評史) 등의 관원 임명이 이루어졌다. 고려초 왕건이 태봉의 직제를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토대로 볼 때 기존의 광치나·서사·외서는 고려 건국 이전 어느 시점에 시중·시랑·낭중 등으로 변화하였던 듯하다. 그 시점은 태봉으로 국호가 변경되면서 국가의 재정비가 이루어졌던 911년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광평성은 고려 시대 중서문하성에 비견되는 관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고려사』의 찬자는 성종(成宗) 원년인 982년에 광평성을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개편하였다가 995년에 상서도성(尙書都省)으로 변경하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려 초의 내봉성(內奉省)을 상서성의 전신으로 보는 이설도 있음이 같은 기사에 부기되어 있다는 점, 고려의 문하시중에 해당하는 광치나가 광평성 소속이었다는 점을 종합해 볼 때, 학계의 중론대로 광평성을 중서문하성의 전신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에 따르면, 광평성은 내의성(內議省)과 기능이 종합되어 982년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이 되었다가, 중서문하성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중서문하성은 1275년 첨의부(僉議府)로 통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