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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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昌誼墓碑 |
영어공식명칭 | Leechangui Tombston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원미경 |
건립 시기/일시 | 1786년 - 이창의 묘비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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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 1704년 - 이창의 출생 |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 1772년 - 이창의 사망 |
현 소재지 | 이창의 묘비 -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
성격 | 비 |
양식 | 비좌개석(碑座蓋石)형 |
재질 | 화강암[개석]|오석(烏石)[비신]|화강암[대석]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272㎝[전체 높이]|155㎝[비석 높이]|66㎝[폭]|37㎝[두께] |
소유자 | 이창의 후손 |
관리자 | 이창의 후손 |
[정의]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우의정을 지낸 이창의 묘비.
[개설]
이창의(李昌誼)[1704~1772]는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방(聖方), 시호는 익헌(翼獻)이며 좌찬성(左贊成) 이태제(李泰蹄)의 아들이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였고, 1736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고, 1737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1740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 1745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747년 충청도관찰사, 1767년 병조판서(兵曹判書), 1768년 호조판서(戶曹判書), 1772년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이창의 묘비(李昌誼墓碑)는 1786년(정조 10) 건립되었다. 이창의가 죽은 뒤 부인이 단식하다가 절명하여 열녀로 정문을 세우고 영조가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였다.
[위치]
이창의 묘비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서 도피안사(到彼岸寺)를 지나 동송읍 관우리로 가는 지방도 제464호에서 관음동 고개를 넘어 왼쪽 부대로 가면 정문 위병소 울타리 밖 오른쪽 산에 있다.
[형태]
이창의 묘비는 비의 머리 부분에 개석을 씌운 비좌개석(碑座蓋石) 형태로 개석은 팔작지붕이며 대석은 문양이 없이 단조롭다. 개석과 대석은 화강암이고, 비신은 오석(烏石)이다. 전체 높이는 272㎝이고, 비석 높이는 155㎝, 폭은 66㎝, 두께는 37㎝이다.
[금석문]
이창의 묘비에는 ‘유명조선국의정부좌의정 증시익헌 이공휘창의지묘(有明朝鮮國議政府左議政贈諡翼獻李公諱昌誼之墓)[증정경부인영일정씨부좌 정경부인 파평윤씨부우(贈貞敬夫人迎日鄭氏祔左貞敬夫人坡平尹氏祔右)]’라고 새겨져 있다. 이창현(李昌顯)이 찬(撰)하고, 윤동섬(尹東暹)이 썼다.
[현황]
이창의 묘비는 마멸 상태가 양호하나 총탄 흔적이 뒷면에 13곳 남아 있다. 묘소는 영일정씨는 부좌(祔左), 파평윤씨는 부우(祔右)이다.
[의의와 평가]
이창의는 우의정을 지낸 인물로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산에 묘소와 묘비가 남아 있다. 이창의의 부인은 이창의가 죽은 뒤 단식을 하다 사망하여 열녀문이 세워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