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6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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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延基羽 |
영어공식명칭 | Yeon Giu |
이칭/별칭 | 연기호(延基浩),연봉렬(延奉烈)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찬호 |
[정의]
개항기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
[개설]
연기우(延基羽)[?~1911]는 삭녕(朔寧)[현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연천군 일대의 옛 지명] 출신으로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1908년 1월의 13도 창의군(倡義軍) 서울 진공 작전 때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연기호(延基浩) 또는 연봉렬(延奉烈)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졌다.
[활동 사항]
연기우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 시절 동료였던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의병 활동을 시작하였다. 6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경기도 연천(漣川)과 강원도 철원 일대에서 활약하며 적을 크게 무찔렀다. 연기우는 군인 출신이라 군율(軍律)에 엄격하였고, 과단성 있는 지휘로 부하들과 지역민의 신망을 얻었다.
1907년 가을 이인영(李麟榮)[1867~1909]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이 조직되어 서울로 진격할 때 연기우는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인근까지 진격하였으나 다른 의병들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하였다. 이인영 총대장이 부친상을 당해 진격 작전 중 고향으로 내려간 것도 패배의 한 요인이었다.
서울 진격 작전이 실패한 후 연기우는 1908년 2월 허위(許蔿)[1855~1908]를 총대장으로 연합 의병을 결성하여 홍인관(洪仁觀)·이병채(李秉采)·조수연(趙壽淵)·김규식(金奎植)·장순원(張洵遠) 등과 경기도 지역에서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1908년 6월 허위가 체포되고 10월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자 연합 의병은 와해되었다.
연기우는 1908년 12월 철원 지역에서 일본 헌병대와 싸워 5명을 사살하고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활약하던 이진용 의병과 연합해 일본군 부대를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 철원·연천 일대에서 활약하던 연기우는 1910년 2월부터 일제가 대대적인 의병 소탕에 나서자 안협(安峽)군[현 철원군]으로 물러났고, 그해 4월 장단(長湍)[현 파주시 장단면]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인 1911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연기우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