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7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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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鴻達 |
영어공식명칭 | Lee Hongdal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엄찬호 |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홍달(李鴻達)[1878~?]은 1878년 철원군 내문면[1952년 폐면]의 마방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내문면 출신 천도교 교훈 최병훈(崔炳勳)이 철원읍에서 3·1운동을 주도하자 내문면에도 독립 만세 운동의 기운이 팽배하였다. 천도교인 이주붕(李周鵬)·최재명(崔在明)·최재청(崔在淸)·박용득(朴龍得)·윤태병(尹泰炳)·강기준(姜祺俊) 등은 내문면 독검리 구장 윤선삼(尹先三)을 앞세워서 마을 주민들에게 통문을 돌렸고, 오동리의 윤상만(尹相萬)과 함께 마방리에서 서당 훈장을 지내던 이홍달도 통문을 받아 내문면 전체의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8일 최재명 등은 새벽부터 독검리 주민들을 이끌고 북창리에 있던 면사무소로 향하였고, 시위대는 북창리까지 행진하면서 오동리·원운리·반석리·내문리 등의 주민들을 대열에 합류시켰다. 이홍달도 마방리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오후 1시경 시위 군중 700여 명은 북창리에 도착하여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면사무소에 태극기를 게양하였고, 도망간 면장을 대신하여 면서기 최병건(崔炳健)에게 독립 만세를 외치도록 하였다. 얼마 뒤 석교리 헌병 파견대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대가 해산 명령을 내렸으나 이홍달 등 시위 군중은 응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 가다가 헌병대가 총을 쏘며 강제 진압을 시도하자 해산하였다.
이홍달은 이날 시위의 주동자로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1919년 8월 28일 경성고등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홍달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