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7800735
한자 金敬順
영어공식명칭 Kim Gyeongso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강원도 철원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원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05월 03일연표보기 - 김경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0일 - 김경순 철원읍 3·1운동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1일 - 김경순 일본 경찰에 검거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25일 - 김경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형과 벌금 20원 언도
추모 시기/일시 2016년연표보기 - 김경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 수훈
출생지 내산리 -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거주|이주지 중리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중리 지도보기
활동지 철원읍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정의학교 교사

[정의]

일제 강점기 강원도 철원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경순(金敬順)[1900~?]은 1900년 5월 3일 철원군 신서면 내산리[현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에서 태어났다. 정의학교(貞義學校) 교사로 근무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동료 교사 엄재형(嚴載亨) 등과 함께 학생들을 이끌고 철원읍에서 전개된 3·1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난 뒤 철원의 천도교인들은 최병훈(崔炳勳)이 평강(平康) 천도교 대교구에서 가져온 「3·1독립선언서」 200여 장을 군내에 배포하고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주모자 11명이 검거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감리교 목사인 박연서(朴淵瑞)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계열이 주축이 되어 3월 10일에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10일의 철원읍 만세 운동은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의 학생들, 기독교인과 지역 청년의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철원군청에서 합류하였고 김경순은 1,000여 명으로 불어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군청 직원들을 위협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고, 저녁에는 월하리(月下里)에 있는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으로 몰려가서 박의병으로 하여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에도 시위가 계속되어 서문거리에 모였던 시위 군중은 철원역으로 향하였다. 철원역에 모인 700명의 군중은 역에 정차한 기차를 향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고 기차에 탔던 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호응하였다. 시위 군중은 다시 읍내로 돌아와 시위를 이어 가다가 서문거리에서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해산하였다.

김경순은 이틀간의 만세 시위를 이끌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고,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월 형과 벌금 20원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2016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경순의 공적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2(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5(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1)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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