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19
한자 山格洞 達城徐氏 世居地
영어공식명칭 Residential place of Dalseong Seo clan in Sangyeok-dong
이칭/별칭 미잠마을,서씨마을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1424년 - 서침 세거지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으로 이전
성격 집성촌
가구수 200여 가구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 있는 달성 서씨 세거지.

[개설]

서씨(徐氏)는 고조선 때 여수기(余守己)가 서씨 성을 하사받은 것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신라 말 고려 초에 서신일(徐神逸)로 이어졌다. 대구에 정착한 것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한 서진(徐晉)이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고 달성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후손들이 서진을 시조로 삼고 달성을 본관으로 세계를 이었다.

[명칭 유래]

산격동연암산[128m]이 매처럼 생겼으므로 매자미·매잠 또는 미잠 등으로 불렸다. 이후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매잠’을 ‘산언덕’으로 잘못 해석하여 ‘산격(山格)’으로 표기하였다는 설이 있다. 또, 우뚝 솟아 절벽을 이루는 연암산금호강 사이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산과 떨어져 있다는 의미로 ‘산격(山隔)’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산격(山隔)’을 ‘산격(山格)’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달성군지』에 따르면, 달성은 신라시대 달구화성(達句火城)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 달성서씨가 세거하면서 ‘달성’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世宗) 대에 군사 요새로 쓰기 위하여 이전을 요구하자 서침(徐忱)이 현 달성공원 일대의 터전을 국가에 헌납하고 하사받은 땅으로 옮기면서 산격동 달성서씨 세거지가 형성되었다. 옛 세거지에는 이를 기록하기 위하여 이은상(李殷相)[1903~1982]이 비문을 쓴 달성서씨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자연환경]

달성서씨 옛 세거지인 달성공원 일대를 이은상은 유허비문에서 “달성공원은 현풍 비슬산(琵瑟山)이 북쪽으로 뻗어 최정산(最頂山)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대덕산(大德山)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원산(圓山)[지금의 두류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또 북으로 떨어졌다가 동으로 굽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어 일어나 동향으로 앉은 것이 바로 달성공원이다.”라고 하였다.

달성서씨가 새로 자리를 잡은 연암산 일대는 대구 중심을 흐르는 신천금호강이 만나는 지점의 평원이다. 특히 금호강낙동강의 문화를 이을 수 있는 접점과 가깝다. 게다가 학문적으로 연경서원(硏經書院), 정구(鄭逑)사양정사(泗陽精舍), 그리고 서사원(徐思遠)의 선사재(仙査齋)를 오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황]

1945년 광복 당시만 해도 산격동에는 달성서씨만 300여 호가 거주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종실 일대에 200여 가구가 모여 살고 있어 ‘서씨마을’로도 불린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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