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렉토리분류

일제강점기 조국의 현실을 고발한 애국 기자, 송기찬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80037
한자 日帝强占期 祖國- 現實- 告發- 愛國 記者, 宋箕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2년 9월 - 송기찬 동아 일보 대구 지국 기자로 채용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 송기찬 남선 노농 동맹 결성 대회에 참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1월 - 송기찬 대구 노동 공제회 제5회 정기 총회에서 집행 위원으로 선출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4년 3월 8일 - 송기찬 남선 노농 동맹 창립 총회에 참석

[정의]

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언론인.

[개설]

송기찬(宋箕贊)[1899?~?]은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송정덕(宋貞德)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학력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스스로 밝혔듯이 초등학교도 4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외 독립운동, 언론·사회 운동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한 송기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김진화는 『일제하 대구의 언론 연구』에서 그의 청년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송기찬은 지사 또는 투사라기보다는 신문 기자의 풍을 가진 기자였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의 활동은 이활(李活)이나 이선장(李善長)에 비해 기사를 취재하고 사건을 보도하는 데 더 많은 경력을 기울인 것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서도 민족의식과 사회적인 정의감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국외 독립운동]

송기찬은 1910년대 후반 20살이 되기 전에 중국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만주에서 몇 년을 보낸 뒤 귀국길에 올랐다. 1920년 2월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폭탄 습격을 기도한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 일제에 저항하는 조선 사람]으로 경찰에 잡혀 6개월간의 구검을 당했다. 이 사건은 신흥 학우(新興學友) 단원 문상직(文相直)과 깊게 관련되었다. 송기찬을 비롯한 사건 연루자 7명은 폭탄을 이용하여 중요 관공서 파괴와 조선 총독부 주요 조선인 관리 암살을 목표로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탄압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경과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14년 만주로 망명한 문상직은 만주 통하현 합니하(哈泥河)에 있는 신흥 학교 군사과를 1년 만에 졸업하고, 1919년 8월 신흥 학교 군사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신흥 학우단을 결성하였다. 1919년 9월 비밀리에 대구에 도착한 문상직은 송기찬·서영균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이때 문상직을 만난 송기찬은 조선 독립에 대해 동의를 표하고 대구에서 폭탄 제조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상의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온 홍우제(洪于濟)와 협의하여 폭탄을 제조하는 대신 만주에서 확보하는 방안을 결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송기찬 등 관련자 7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 노동 공제회]

송기찬은 언론 활동을 하면서도 대구의 본격적인 노동 운동 단체인 대구 노동 공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구 노동 공제회의 전신은 조선 노동 공제회 대구 지회였다. 1923년 1월 23일 조선 노동 공제회 대구 지회가 동 회관에서 제4회 정기 총회를 개최하고 회명을 대구 노동 공제회로 개칭하고, 회장제에서 집행 위원제로 개편하였다. 이후 대구 노동 공제회는 농민 대회를 개최하여 농민 문제를 주요 활동 방침으로 정하였고, 대구 지역 노동 운동 단체의 결성에 집중하였다.

송기찬은 1924년 사상 단체 상미회(尙微會) 회원이자 대구 노동 공제회 회원으로서 남선 노농 동맹 결성 대회에 참가하였다. 상미회는 1923년 여름에 창립한 대구 최초의 사상 단체였다. 여기에는 최원택(崔元澤)·이상훈(李相薰)·신철수(申哲洙)·이여성(李如星) 등이 중심 인물이었다. 송기찬도 김명규 등과 함께 상미회에 참가하였다. 상미회는 1924년에 이르러 정오회(正午會)로 개칭하였는데, 이때 정칠성(丁七星)·이춘수(李春壽)·고명자(高明子) 등 여성 사회 운동가들과 김정규(金正奎)·윤우열(尹又烈) 등이 가담하였다. 송기찬은 이상훈·김정규·최원택 등과 함께 1924년 1월에 열린 대구 노동 공제회 제5회 정기 총회에서 15명의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어 소작인의 권익 옹호 방안을 논의하였다.

송기찬은 1924년 3월 8일부터 이틀 동안 대구의 만경관(萬鏡館)에서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등의 20여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개최된 남선 노농 동맹 창립 총회에 참석하였다. 이 총회의 성사를 위해 대구 노동 공제회가 본부 역할을 맡았다. 대구 노동 공제회의 정운해를 비롯해 김종범, 서정희 등이 창립 준비 위원을 담당하였다. 송기찬은 남선 노농 동맹 창립 대회에 제1회 발기 회의록 낭독을 진행하였다.

이 창립 총회에서 강령으로 ①우리는 단결의 힘으로써 노농 계급의 해결을 기한다, ②우리는 완전무결한 사회의 실현을 기하는 동시에 각각의 복리 증진과 생활 향상을 도모한다, ③노농 운동의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전국적 총단결의 촉성을 기한다 등의 3개항을 채택하고, 각 지방 소작 상황의 조사, 각지 소작 단체 내용 조사, 소작 단체의 조직, 이류(異類) 소작 단체, 소작 조건, 농업 개량 등에 관한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또한 각 지방에서 벌어지고 노동 문제, 동척 이민 문제, 동아 일보 문제 등 사회적 현안에 대해 토의하였다. 그리고 총회 폐회 후에 다시 전선 노농 운동자 간담회를 열고 반동 세력 및 노농 운동 방해자에 대한 대책, 형평 문제, 관동 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문제, 동아 일보 대구 지국윤홍열 제재 문제, 단체기의 제조, 관내 상황 보고, 대구 유기 제조 직공 파업 문제 등을 토의하였다.

남선 노농 동맹의 본부는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고, 전국적인 노농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10인의 전조선 노농 단체 연합회 기관 기성 교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를 위해 전형 위원 49인과 임원을 선정하였다. 창립 대회 후 참가자들은 노동기를 앞세우고, 노동가를 부르며 대구부 내를 행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24년 4월 일제하 노농 운동 조직의 획기적 전환을 의미하는 조선 노농 총동맹이 창립될 수 있었다. 이 동맹에 대구 노동 공제회의 정운해·마명·최원택 등이 50인의 중앙 위원에 선정되었다. 따라서 대구 노동 공제회는 남선 노농 동맹의 결성을 성공적으로 진행시켜 조선 노농 총동맹의 창립에 강력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세계 대공황 이후 조선 농촌의 위기를 돌파할 방법으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시하였다.

"나는 4년제의 보통 학교(普通學校)를 마친 이외에 그 이상의 학교(學校) 구경을 못한 사람이니 학교 선택에 대답할 자격(資格)을 가지지 몯하엿습니다. 그러나 구태여 지금 네가 학교에 들려 하면 어느 학교로 가겟느냐 할 때에는 나는 서슴지 안코 농림 학교(農林學校)를 가르칠 것이며 앞으로 내 동생이나 자식에게도 그들의 성격상 큰 현융(懸隔)이 없는 한에는 그리로 넣겟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무어라든지 조선은 농업국이니 앞으로 흥하는 것도 이 우에 더 망하는 것도 오로지 농촌 문제의 해결 여하(如何)에 잇기 때문입니다" [『동광 』18, 1931. 2. 1].

[동아 일보 대구 지국 기자로서 언론 활동]

1920년 귀국길 폭탄 사건에 연루된 뒤 동아 일보 대구 지국에서 기자로 활동하게 되었다. 1921년 당시 동아 일보 대구 지국을 운영하던 사람은 최원택(崔元澤)이었다. 그 뒤 서상일(徐相日)이 동아 일보 대구 지국을 인수한 뒤 서상일과 함께 30년간 언론계에 종사한 터줏대감이 되었다. 정확하게 1922년 9월 동아 일보 대구 지국 기자로 채용되었던 것이다. 특히, 1920년대와 1930년대 동아 일보 대구 지국의 성향에 맞게끔 언론 활동을 벌였다. 동아 일보 대구 지국은 대구의 민족 비교를 통해 대구가 일본인의 도시로 전락해 있음을 각종 통계와 도시 경관, 각종 사회 현상 등을 통해 증명해 보였다. 나아가 대구 조선인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곧 지주와 자본가 등 부호와 노년층에게는 각성을 촉구하였으며, 신흥 사회 계층의 성장에 주목하면서 대구 구락부, 대구 상공 협회 등을 만들어 그들의 활동 공간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서상일과 서로 믿는 사이가 되었고 취재 활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 대구 노동회 사건, 울릉도 설화 사건, 김창숙 검거 송치 사건 등을 누구보다 앞서 취재 보도하였다. 1928년 무렵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중심으로 한 학생들의 비밀 결사 사건 때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고등계 주임의 사택 마루 밑에 숨어들기까지 한 치밀함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의 관심사는 특히 식민지 시대 사회 문제였다. 일제와 조선인 지주·자본가에 피해를 입은 조선 사회와 민중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렇기에 그는 단순 기사 보도보다는 사회 문제를 심도 깊게 파고드는 심층 기사 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 사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밀양(密陽) 군청 이전 반대 운동 맹렬, 군민 대회는 금지[『동아 일보』 1927. 5. 7], 한재(旱災)의 경북[『동아 일보』, 1928. 9. 18∼1928. 11. 24], 박간(迫間) 농장[『동아 일보』, 1932. 2. 9∼1932. 2. 14], 눈 속에 묻힌 가지가지 애화(哀話)[『동아 일보』, 1934. 2. 18], 동해 해산 운수차 대구 영천 경궤도 시승[『동아 일보』, 1926. 6. 24∼1938. 7. 2] 등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온 자신에게 신문 기자로서의 단상과 회한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문 기자도 아니요, 신문 영업자도 아닌 두리뭉성이가 그것이 아닌가 한다. 신문 기사를 쓰는가 하면, 광고 한 행에 얼마라는 계산을 하여야 되고 취재의 길을 나서는가 하면 독자 확장이라는 길을 이끄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하나를 옳게 못 해 본 가운데 세월은 달아나서 사람으로 단 한 번밖에 더 맞지 못하는 인생의 봄과 여러 차례 자연의 봄을 밧치고 난 오늘날 나이 앞에 놓여진 상살잔고(相殺殘高)가 무엇인지 나로도 지적할 바를 알지 못하겠거니와 다만 하나 10년 이상 상근 표창장 한 장이 웃게도 하고 또한 울게도 할 뿐이다. 하여간 내일의 봄을 알기 위하여 금일의 봄을 모르고 넘기는 데에 일맥의 위안을 거는 것” [『동아 일보』「송기찬 오는 봄 웃는 봄(八路八景)」, 1935. 4. 27].

[일제강점기 조국의 현실을 고발한 언론인 송기찬]

송기찬은 넉넉지 않은 가정 환경과 높지 않은 학력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민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국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일제 관헌에 탄압을 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언론인으로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 문제를 집중적으로 취재하여 알렸다. 그리고 대구 노동 공제회와 상미회에서 전국적 노동 운동 단체의 결성과 지역 사회 노농 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