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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77
한자 壽城區- 文化遺産
영어공식명칭 Cultural Heritages in Suseong-g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배성혁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의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주요한 문화유산.

[개설]

수성구에는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3건, 보물 13건, 국가민속문화재 2건, 대구광역시 지정 유형문화재 8건, 무형문화재 2건, 기념물 4건, 문화재자료 4건 등 모두 36건의 지정문화재가 있다. 이중 국보 3건, 보물 13건, 국가민속문화재 2건은 국립대구박물관 소장품으로 순수한 지역문화재로 보기는 어렵다. 비지정 문화재는 신석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유적들로 청동기시대 대규모 분묘와 취락, 삼국시대 대규모 고분군과 취락, 통일신라시대 수창군 관련 건물지와 취락, 조선시대 관방 유적이 대표적이다.

한편,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

1. 국보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국보 제182호, 1976. 4. 23.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976년 경북 선산군 고아면 봉한2동 뒷산에서 국보인 금동보살입상 2구와 함께 출토되었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만든 통일신라 불상으로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1)[국보 제183호, 1976. 4. 23.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7세기 중엽에 제작된 보살상으로 1976년 국보 금동여래입상과 국보 금동보살입상과 함께 출토되었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1976-2)[국보 제184호, 1976. 4. 23.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살상으로 1976년 국보 금동여래입상과 국보 금동보살입상과 함께 출토되었다.

2. 보물

의성 관덕동 석사자[보물 제202호, 1963. 1. 2.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9세기 초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보물]의 기단 윗면에 배치되어 있던 네 마리의 사자상 가운데 남아 있는 사자상 2구로 한 쌍은 1940년에 분실되었다.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장엄구[보물 제325호, 1963. 1. 2.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959년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수리과정에서 2층 탑신의 구형석함(龜形石函) 속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칠곡 정도사지 오층석탑[보물 제357호, 1963. 1. 2.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경북 칠곡군 정도사터에 있었던 것을 1924년에 경복궁으로 이전하였다가 1994년에 국립대구박물관으로 다시 옮겼다. 위층 기단에 탑의 이름과 ‘태평십일년’의 연호 및 연대가 새겨져 있어 1031년(고려 현종 22)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김일손 거문고[보물 제957호, 1988. 6. 16.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탁영 김일손이 사용하던 거문고로 1490년(조선 성종 21)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길이 160㎝, 너비 19㎝, 높이 10㎝이다.

밀성박씨 삼우정파 종중 고문서[보물 제1237호, 1996. 1. 19.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밀양박씨 삼우정파 문중에서 소장한 조선 선조 때의 무신 박경신[1539~1594]과 두 아들 박지남, 박철남에게 내려진 각종 관련 문서 17점[16건 1책]이다.

화원 우배선 의병진 관련 자료-교지(교첩)[보물 제1334-2호, 2002. 1. 2.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대구 월촌의 단양우씨 종손가에 소장되어 있던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1569~1621]과 관련된 교지, 간찰, 각택기 등 14점[교지 12점, 간찰 1점, 각택기 1점]이다.

청자 상감오리모양 주전자[보물 제1398호, 2004. 3. 3.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오리를 주제로 하여 독창적인 기형과 화려하고 정교한 문양장식의 표현, 정선된 태토와 비색의 유약을 입힌 상형청자(像型靑磁)이다.

분청사기 상감모란당초문 장군[보물 제1400호, 2004. 3. 3.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안정감 있는 기형에 활달하고 대담한 문양과 섬세한 인화기법이 적용된 작품이다.

금동당간용두[보물 제1410호, 2004. 6. 26.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경북 풍기에서 발견되었으며, 당간 꼭대기에 올려 장식하였던 장치로 깃발을 매달 때 줄을 거는 역할을 하였다. 통일신라 제작품으로 사찰에 사용하던 보당(寶幢)의 형식과 그 위에 올린 용두 장식의 조합이 밝혀진 중요한 실물 자료이다.

이헌국 호성공신교서[보물 제1617호, 2009. 6. 29.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임진왜란 때 선조와 세자를 모시고 함께 따라간 공로를 인정받아 1604년 이헌국에게 내려진 3등 공신 책록 교서이다.

대구 보성선원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및 복장유물[보물 제1801호, 2013. 4. 29.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삼존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청허의 계보를 잇는 현욱이 수조각승으로 제작한 첫 작품이며, 복장유물에 포함된 조성 발원문을 통하여 1647년이라는 정확한 조성 시기, 봉안 사찰, 조성 주체, 제작자 등을 알 수 있다.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보물 제1904호, 2016. 7. 1.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916년에 갈항사터의 동·서 삼층석탑을 경복궁으로 이건하던 중 발견된 사리기 4점, 준제다라니 1점이다. 동탑의 상층 기단 면석에 758년(경덕왕 17) 언적법사(言寂法師)와 두 누이가 함께 발원하여 탑을 건립한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 사리장엄구도 이때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

경산 신대리 1호 목관묘 출토 청동호랑이모양 띠고리[보물 제2017호, 2019. 3. 6.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유사 양식의 호형대구 중 보존 상태가 가장 좋고 뛰어난 주조 기법을 보인다.

[국가민속문화재]

흥선대원군 기린흉배[국가민속문화재 제65호, 1979. 1. 23.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흥선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관복에 달았던 기린흉배로 19세기에 제작된 것이다.

진주하씨 묘 출토유물[국가민속문화재 제229호, 1993. 7. 20. 지정, 국립대구박물관 소장]: 1989년 현풍곽씨의 후손들이 경북 달성군에 있는 12대 조모인 진주하씨의 묘를 이장하다가 발견하였다. 유물은 장옷, 창의, 저고리, 이불, 베개, 돗자리, 머리빗, 빗첩, 편지, 서간문 등 249점이다.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

1. 유형문화재

영영축성비[유형문화재 제4호, 1982. 3. 4. 지정]: 경상도관찰사였던 민응수가 나라에 건의하여 1737년(영조 13) 대구읍성의 남문 밖에 세웠는데, 1906년(광무 10)에 읍성을 철거하자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가 1980년 망우당공원에 재현한 영남제일관 앞으로 다시 옮겼다.

대구부수성비[유형문화재 제5호, 1982. 3. 4. 지정]: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한 김세호대구부성을 수리한 기념으로 1869년(고종 6)에 세운 비이다. 1932년 대구향교로 옮겼다가 1980년 망우당공원에 재현한 영남제일관 앞으로 옮겨져 영영축성비와 나란하게 세워져 있다.

이공제비 및 군수이후범선 영세불망비[유형문화재 제23호, 1988. 5. 30. 지정]: 한 채의 비각 안에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비이다. 왼쪽은 대구판관을 지낸 이서의 치적을 기리기 위하여 1797년(정조 21) 세운 이공제비, 가운데에는 왼쪽의 이공제비가 초라하여 1805년(순조 5) 다시 세운 이공제비, 오른쪽은 1899년(광무 3) 세운 군수이후범선 영세불망비이다.

대구 동대사 고려불경 일괄[유형문화재 제63호, 2012. 1. 30. 지정]: 대방광불화엄경 권12, 대방광불화엄경 권43, 일승법계도, 불설치성광대위덕금륜왕소재길상다라니경 등 모두 4축이다.

천태사교의집해[유형문화재 제67호, 2013. 10. 30. 지정]: 고려 승려 체관(諦觀)[900~975]이 천태사상을 집약·정리한 천태사교의에 대하여 여러 사람이 해석한 내용을 송나라 승려인 종의(從義)[1042~1091]가 집해한 책으로 15세기에 금속활자인 을해자(乙亥字)로 간행된 것이다.

감지금은니문수최상승무생계법(묘덕계첩)[유형문화재 제78호, 2016.03.10 지정]: 인도 승려로 중국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1300~1363]이 자신이 번역한 『문수최상승무생계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지켜야 할 계율의 내용을 1326년(충숙왕 13)에 묘덕(妙德)에게 써 준 계첩이다.

묘법연화경 권4~7[유형문화재 제82호, 2018.02.12 지정]: 『묘법연화경』 7권 가운데 권4~7로 1책만 전해지고 있다. 천태종의 근본경전으로 법화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목판본으로 15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입학도설[유형문화재 제83호, 2019. 1. 30. 지정]: 권근(權近)[1352~1409]이 성리학의 기본원리를 도식화하여 설명한 성리학 입문서로 초간본을 바탕으로 채무일(蔡無逸)[1496~1556]이 발문을 넣어 1545년 전북 낭주[현 부안]에서 간행한 세 번째 간행본이다.

2. 무형문화재

무형문화재로 고산농악[무형문화재 제1호, 1984. 7. 25. 지정]과 욱수농악[무형문화재 제3호 1988.05.30. 지정]이 있다.

3. 기념물

사월동 지석묘군[기념물 제9호, 1992. 9. 8. 지정]: 청동기시대의 무덤군으로 마을에서는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다. 지석묘의 상석 4기가 확인되는데, 규모는 길이 170~237㎝, 너비 110~160㎝ 정도이다.

상동 지석묘군[기념물 제12호, 2006. 4. 20. 지정]: 청동기시대 무덤군으로 원위치에서 옯겨진 상석 4기가 확인되는데, 규모는 길이 205~284㎝, 너비 101~150㎝, 높이 30~170㎝ 정도이다.

노변동사직단[기념물 제16호, 2006. 4. 20. 지정]: 조선시대 종묘(宗廟)와 함께 나라의 신과 곡식을 맡은 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인 사직단은 지방 행정단위인 주현(州縣)마다 설치하였는데, 관아의 서쪽에 세웠다. 노변동의 것은 경산현사직단으로 문헌상으로도 확인된다.

대구 법이산 봉수대[기념물 제18호, 2020. 9. 10. 지정]: 조선 전기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던 대구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군사통신 유적이다. 발굴을 통하여 방호벽이나 출입구 등 세부시설이 조사되었는데, 방호벽의 외부 둘레가 106.5m로 지금까지 확인된 봉수들에 비해 규모가 크며 보존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4. 문화재자료

야수정[문화재자료 제14호, 1984. 7. 25. 지정]: 진씨 가문의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1900년 경 지은 재실로 한국과 일본 양식이 절충된 건물이다. 지을 당시에는 정면 5칸·측면 1칸 반의 규모였으나, 나중에 뒤쪽 부분 전체를 반 칸씩 늘려 겹집처럼 되어 있다.

고산서당[문화재자료 제15호, 1984. 7. 25. 지정]: 퇴계 이황우복 정경세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당이다. 1690년(숙종 16)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칭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고 한다.

독무재[문화재자료 제17호, 1989. 6. 15. 지정]: 19세기 중엽 하시찬을 모시기 위하여 제자들이 세운 재실이다. 재실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며, 왼쪽 뒤에는 사당인 경덕사가 있다.

하효자 정려각[문화재자료 제18호, 1989. 6. 15. 지정]: 고려 때 이부시랑을 지낸 하광신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하여 조정에서 세운 비각이다. 1327년(충숙왕 14) 마을 입구에 정문을 세웠다고 하며, 1781년(정조 5) 정려각을 다시 지었으나 일제강점기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만촌1동 389-9번지로 옮겼다고 한다.

[비지정문화재]

문헌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 수성구의 역사를 잘 보여 주는 유적들로서 다수의 지표조사와 120여 건에 이르는 발굴 조사를 통하여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 유적으로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네발로 걷는 초식 용각류 공룡의 것으로 알려진 욱수동 공룡발자국이 있다. 발굴조사를 통하여 신석기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적들이 확인되는데, 그중에서도 청동기시대 분묘와 취락, 삼국시대 신천 변과 고산지역 일대의 대규모 고분군과 취락, 통일신라시대 수창군 관련 건물지와 취락, 조선시대 관방 유적이 주목할 만한 유적들이다.

1. 선사시대

수성구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시지동 일대에서 구석기가 채집된 바 있어 구석기시대로 볼 수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은 2개소로 신천 상류에 위치한 상동 지석묘군에서 중기의 빗살무늬토기, 상동 522-4유적에서 수혈 3기와 후기의 빗살무늬토기편이 출토된 바 있다. 더불어 신천의 중류와 하류에서도 주거지와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어 신천금호강 일대에 넓은 범위로 신석기문화가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유적은 분묘와 취락을 구성하던 생활 유적이 주류를 이루며, 지역적으로 신천변 유적과 금호강, 매호천, 욱수천 일대의 고산 지역 유적으로 크게 구분된다. 신천 일대에서는 분묘와 주거지가 밀집되어 대규모 취락의 모습을 보여 주는 반면, 고산지역에서는 산발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양상이다.

신천변 유적에서는 19개소의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상동중동 일대에 분포한다. 대규모 취락 내에서 분묘와 생활 유적의 공간이 분할되어 있으며, 청동기시대 전 기간에 조성되었다. 분묘는 9개소로 상동 1-64유적[30기], 상동 74유적[34기], 상동 지석묘군[42기], 중동 356-7유적[21기]을 대표로 하여 고인돌 및 돌널무덤과 돌덧널무덤 150기와 토광묘 1기가 조사되었다. 종류별로는 지석묘 상석 23기, 판석식 석관묘 20기, 천석식 석곽묘 107기가 확인되었으며, 내부에서는 석촉과 석검 등 석기류가 출토되는 데 비하여 토기의 출토 예가 거의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생활 유적은 12개소로 상동중동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주거지는 모두 59기가 확인되었는데, 상동 80유적[15기]과 상동 89-2유적[20기]을 제외하고는 유적마다 1~8기가 확인되어 수량 차이를 보인다.

고산 지역 유적에서는 26개소의 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금호강과 소지류인 매호천욱수천의 주변에서 분묘와 생활 유적이 확인된다. 금호강 변에서는 가천동 137-1유적, 가천동 산146유적, 가천동 산18유적 등 3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유적마다 주거지 2기씩 확인되었다. 매호천 변에서는 분묘와 생활 유적 14개소가 조사되었다. 분묘는 매호동시지동 일대 유적 8개소에서 지석묘 상석 12기, 돌널무덤 15기, 돌덧널무덤 17기가 확인되었다. 생활 유적은 매호동시지동 일대 유적 6개소에서 주거지 9기와 집석, 수혈, 구 등이 확인되었다. 욱수천 변에서는 분묘와 생활 유적 8개소가 조사되었다. 분묘는 사월동 지석묘①②, 신매동 510-156유적, 욱수동 134유적 등 4개소에서 지석묘 상석 10기, 돌널무덤 1기, 돌덧널무덤 4기가 확인되었다. 생활 유적은 사월동 400유적, 신매동 164유적, 욱수동 77유적에서 주거지 1기가 각각 조사되었다. 그 외 두리봉 동편자락인 이천동 280-1유적에서는 주거지 2기가 조사되었다.

초기철기시대 유적은 6개소가 확인되었다. 특히, 1966년 발견된 만촌동 청동기 유적에서는 세형동검 3점, 중광형동과(中廣形銅戈) 1점, 검파두부장식편, 검코 부속구편, 동검끝장식, 동검칼집부속구 등이 발견되었는데, 유물은 낙랑군과 한(韓) 그리고 왜와의 상호관계를 설명하여 주고 있어 주목된다.

2. 원삼국 및 삼국시대

원삼국 유적은 6개소에서 분묘와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분묘는 기원전 1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조성된 목관묘와 옹관묘로 유적마다 1~4 정도 조사되었는데, 욱수동 128유적, 욱수동 103유적, 가천동 산146유적, 가천동 541-2유적, 가천동 산4-5유적이 있다. 생활 유적은 매호동 1008유적이 유일한데, 3세기 후반~4세기 후반까지 지속된 원삼국~삼국시대의 주거지 29기가 조사되었다.

삼국시대 유적은 고분군과 취락과 관련된 생활 유적, 생산 유적, 관방 유적이 있는데, 크게 신천변 유적과 금호강, 매호천, 욱수천 일대의 고산 지역 유적으로 양분된다.

신천변 유적에서는 상류 지역에서 소규모 고분군의 형태로 확인된다. 두산동 고분군은 72기의 고분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4개 지점의 발굴을 통하여 4세기 후반~6세기 후반경의 나무덧널무덤 2기, 돌덧널무덤 21기, 돌방무덤 4기, 옹관묘 2기가 조사된 바 있다. 그 외 만촌동 신라묘군에서는 돌덧널무덤 및 돌방무덤 27기, 파동 산5-1유적에서는 봉토분 4기와 돌덧널무덤 42기가 조사되었다.

고산 지역 유적은 26개소의 유적이 알려져 있는데, 모두 경산 지역과 관련된 유적들로 보인다. 금호강과 그 소지류인 매호천욱수천의 주변에서 분묘와 생활 유적, 생산 유적, 관방 유적이 확인되는데, 신천 변과는 달리 대규모 고분군과 취락의 형태를 보인다. 금호강 변에는 대규모 가천동고분군에 포함되는 7개소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4~7세기대 나무덧널무덤 48기, 돌덧널무덤 387기, 돌방무덤 10기가 조사된 바 있다. 그리고 고모동 일대에는 고모동 고분군①~③이 분포하며, 고모동 18-1유적에서는 6~7세기대 돌덧널무덤 14기, 돌방무덤 9기가 조사된 바 있다. 매호천 일대에는 대규모인 노변동 고분군과 소규모인 삼덕동 고분군, 대흥동 고분군, 시지동 고분군이 알려져 있다. 노변동 고분군 일대에서는 노변동 산3유적, 시지 택지 개발 지역 내 유적, 신매동 510-156유적 등의 조사를 통하여 나무덧널무덤, 돌덧널무덤, 옹관묘, 제사유구 등 삼국시대 분묘 1,539기가 확인되었는데, 돌덧널무덤 위주로 밀집 조성된 특징을 보인다. 그리고 삼덕동 고분군 일대에서도 삼덕동 302-1유적과 삼덕동 산9-4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돌덧널무덤 30기가 확인된 바 있다. 욱수천 일대의 욱수동 고분군에서는 5개 유적의 발굴을 통하여 나무덧널무덤, 토광묘, 돌덧널무덤, 옹관묘, 제사유구 등 삼국시대 분묘 251기가 조사되었다. 생활 유적은 35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매호천욱수천 사이의 선상지인 시지동, 신매동, 욱수동 일대의 유적들이 하나의 대규모 취락의 모습을 보여 크게 ‘시지동 생활 유적’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시지동 생활 유적은 4세기 중후반부터 토기와 철기 장인들이 모여들면서 형성된 대규모 취락으로 삼국시대 지방소도시의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유적에서는 건물지, 주거지, 고상가옥, 수혈, 주혈, 우물, 도로 등이 다량 조사되었으며, 철기와 토기의 생산 공방들도 확인된다. 한편, 생산 유적은 욱수동 산48-1유적에서 토기가마 5기 및 관련 수혈유구 4기가 조사되었다. 4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조업이 이루어졌으며, 삼국시대 경주를 제외하고는 지방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의 토기 생산 단지로 주목받고 있다. 관방 유적은 성동 산성욱수동 산성이 있다.

3. 통일신라~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 유적은 분묘와 생활 유적, 유물산포지 등 26개소가 알려져 있다. 분묘는 시지동 60-1유적에서 석실분 1기, 황금동 산137유적에서 돌방무덤 2기, 돌덧널무덤 1기, 파동 암음유적에서 돌방무덤 1기와 제사지 1기가 조사되었다. 생활 유적은 9개소로 건물지와 주거지, 수혈, 우물, 도로 등이 확인되었는데, 매호동 580-1유적, 사월동 600유적, 상동 80유적, 상동 89-2유적, 중동 356-7유적, 중동 485-1유적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상동중동 일대에서는 대부분 쪽구들을 갖춘 주거지 36기와 건물지, 도로 등이 조사되었는데, 신라 신문왕대 이후 대구의 중심지로 자리잡은 수창군과 관련된 유적들이다. 특히, 중동 356-7유적의 대형 건물지에서는 용면와, 암수막새 등 격이 높은 유물들이 출토되어 수창군의 공해 건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 유적은 발굴조사를 통하여 21개소가 확인되었는데, 분묘와 생산 유적, 생활 유적 등이다. 분묘는 2개소로 내환동 산3유적에서는 토광묘 212기와 골호 4기, 욱수동 산48-1유적에서는 토광묘 67기가 확인되었는데, 모두 고려~조선시대에 걸쳐 조성되었다. 생산 유적은 4개소로 기와가마가 확인된 범어동 379유적과 성동 와요지, 삼가마가 확인된 중동 485-1유적, 기와가마와 삼가마가 모두 확인된 욱수동 35유적이 알려져 있다. 생활 유적은 가천동, 사월동, 상동, 중동 일대에서 17개소가 확인되었는데, 건물지, 주거지, 고상가옥, 석축, 배수로, 우물, 수혈, 와적시설, 도로 등이 확인되며 고려~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유적들도 있다.

4. 조선시대~근대

조선시대 유적은 유존하는 건조물과 자연유산, 그리고 발굴조사를 통하여 밝혀진 봉수, 사직단, 분묘, 건물지나 주거지 등의 생활 유적들이 알려져 있다. 현존 건조물은 12개소로 사당, 서원, 정려각, 비, 묘 등이다. 노변동정지언 정효각[고종], 범물동의 효열밀양박후성처성주배씨지려비[조선 후기]와 전주최씨 사당[1900년경], 시지동의 비석군[조선], 이천동의 가선대부 양정운 묘 및 비[조선], 지산동효자하잠동지려비[1853년 중수], 황금동청호서원[1694년]이 알려져 있다.

자연유산은 9건으로 만촌동 모과나무[600년], 고모동 이팝나무[300년], 범물동 느티나무[200년], 범어동 은행나무[1000년], 성동 느티나무[300년], 수성동 느티나무[350년], 지산동 느티나무①[400년], 지산동 느티나무②[400년], 지산동 느티나무③[100년]이 보호수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발굴 유적 36개소는 분묘와 관방 유적, 공해 유적, 생산 유적, 생활 유적이다. 분묘는 10개소로 모두 토광묘가 확인되었으며, 가천동 산146유적[43기], 범어동 405-16유적[30기], 연호동 산8유적[29] 등이 대표적이다. 관방 유적은 2개소로 대구 법이산 봉수대[기념물 제18호]와 대구 성산 봉수대가 조사된 바 있다. 공해 유적은 노변동 산3번지에서 조선시대 경산현노변동사직단[기념물 제16호]이 조사 후 복원되어 있다. 생산 유적은 2개소로 가천동 541-2유적에서 보시설과 노시설, 신매동 57유적에서 기와가마 3기가 조사되었다. 생활 유적은 27개소에서 확인되었다.

근대 유적은 1876년 개항 이후의 건축된 서원, 서당, 재실, 정려각, 철도관사 등으로 20세기 초반에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고모역 철도관사[1930년], 만촌동명정각[1912년], 성동퇴도이선생 우복정선생 강학 유허비[1872년], 성산재[1938년], 파동오천서원[1905년 이건], 황금동의 첨모재 및 덕산서원[1926년]이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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