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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30
한자 李縡
이칭/별칭 희경(熙卿),도암(陶庵),한천(寒泉),문정(文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80년연표보기 - 이재 생
활동 시기/일시 1702년 - 이재 알성 문과 병과 급제
몰년 시기/일시 1746년연표보기 - 이재 졸
추모 시기/일시 1776년 - 이재 문정(文正) 시호 받음
추모 시기/일시 1802년 - 이재 제향하는 한천 서원이 용인에 건립
거주|이주지 이재 거주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부임|활동지 이재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묘소|단소 이재 묘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사당|배향지 한천 서원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
성격 문신|학자
성별
본관 우봉(牛峯)
대표 관직 호조 참판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 각석군에 글씨를 남긴 문신.

[가계]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한천(寒泉). 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이숙(李䎘)이고, 아버지는 진사 이만창(李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송준길(宋浚吉)의 외손이다.

[활동 사항]

이재(李縡)[1680~1746]는 23세가 되던 1702년(숙종 28)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 문학, 정언, 홍문관 부교리, 이조좌랑 등에 임명되었다. 1716년(숙종 42) 『가례원류(家禮源流)』의 편찬자를 둘러싸고 시비가 일자 노론의 입장에서 소론을 공격하였으며, 송시열(宋時烈)의 제자로 노론인 권상하(權尙夏)를 비호하였다. 이후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하였다.

1722년(경종 2) 임인 옥사 때 중부(仲父) 이만성(李晩成)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옥사하자, 가솔(家率)을 이끌고 인제 가덕(佳德) 산촌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725년(영조 1) 영조 즉위 후 부제학이 되었다가 이조 참판, 호조 참판 등을 거쳤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이후 용인 한천동(寒泉洞)[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에 거주하면서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이재송시열을 계승한 노론의 입장에서 송시열을 배향한 도봉 서원에 참배하고, 도봉 서원 앞 계곡에 「광풍제월 천옹서(光風霽月泉翁書)」라는 글씨를 새기기도 하였다. 글귀는 『송서(宋書)』「주돈이전편(周敦頤傳扁)」의 “정견이 일컫기를 그의 인품이 심히 고명하여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도다.”에서 인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여기서 ‘광풍제월’이란 훌륭한 인품을 말하기도 하지만,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광풍제월 뒤에는 이재의 호인 ‘한천’을 따서 ‘천옹서(泉翁書)’라고 자신을 밝히고 있다.

[학문과 저술]

이재영조의 탕평책을 부정한 노론 중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낙론의 거두인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해 호론인 한원진(韓元震) 등의 심성설(心性說)을 반박하는 입장에 섰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뛰어나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 『도암집(陶庵集)』, 『도암과시(陶庵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어류초절(語類抄節)』 등 다수가 있다. 연보(年譜)와 가장(家狀)에 따르면 「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근사록심원(近思錄尋源)」, 「오선생 미언(五先生徽言)」, 「검신록(檢身錄)」 등을 50세 이후 만년까지 저술하였고, 이이(李珥)의 『율곡집(栗谷集)』을 『율곡전서(栗谷全書)』로 증보하여 편찬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천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776년(영조 52) 문정(文正) 시호를 받았으며, 1802년(순조 2) 이재를 제향하는 한천 서원(寒泉書院)이 용인에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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