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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군사정변과 한강인도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21
한자 五一六 軍事政變과 漢江人道橋
영어공식명칭 5·16 Military Coup and Hangang Bridg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혜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 - 한강인도교에서 쿠데타 세력과 헌병들의 총격전 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5월 16일 - 군사혁명위원회 구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5월 18일 -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5월 20일 - 혁명내각 구성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6월 6일 - 국가재건비상조치법 제정 공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7월 2일 -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체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1년 7월 3일 -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취임

[정의]

박정희 소장이 주도한 군사정변과 그 과정에서 벌어진 한강인도교에서의 총격사건.

[5·16 군사정변의 배경과 모의]

1961년 5월 16일 발생한 군사정변은 헌정질서를 중단시키고 한국 현대사에서 군사정권 시대를 연 사건이었다. 박정희 소장을 필두로 김종필 등 일부 육군 장교들이 일으킨 이 사건은 몇 가지 측면에서 그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국내적 측면으로서 4·19혁명 이후 조성된 정치·사회적 정세의 유동성이다. 이승만 정권의 붕괴로 성립한 장면 정부는 4·19혁명의 과제를 수행하는 데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었다. 부정축재자 및 선거부정 관련자 처리는 더디게 진행되었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억압되었다가 분출하는 수많은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수렴·해결하는 데도 한계를 보였다. 오히려 장면 정부는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는 등 각 분야에서 분출하는 요구에 억압적으로 대응했고, 이는 대중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렀다. 가속화되는 민주당의 내분 또한 정치적 불안정을 고조시키는 요인이었다. 신파와 구파로 분열된 민주당은 극심한 내부 분열에 시달렸다. 장면이 주도하는 신파와 윤보선·김도연 등이 중심이 된 구파는 7·29 총선 후 내각책임제 헌법 아래서 구성되는 정부의 총리와 대통령직을 놓고 대립했다. 그리고 조각과 몇 차례의 개각 과정에서 갈등을 겪은 후 결국 구파는 민주당과 결별하고 1961년 2월 20일 신민당을 창당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혁신계와 청년·학생, 노동 분야 등 다양한 계통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는 사회운동도 정치사회적 불안정성을 가중시키는 요인이었다.

두번째는 대외적 요인으로서 미국의 대한정책의 변화이다. 미국은 1950년대 말부터 대외 원조정책의 방향을 전환해 직접 원조를 삭감하고 피원조 국가의 자체 생산력 강화를 도모했다. 특히 이와 관련해 미국 안에서 풍미하고 있던 근대화론에서는 경제성장을 중요한 과제로 설정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강조하면서 군부를 그 주요 구성 부분으로 평가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는 미국의 이런 분위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군부 집단을 자극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1950년대 전세계적으로 빈발하고 있던 군사 쿠데타도 군부의 정치 관여 욕구를 유인하는 요소였다.

쿠데타 세력 내부에서 본다면 청년 장교들 사이에 쌓인 불만과 좌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인사 적체에 대한 분노가 심각했다. 예를 들어 당시 육군참모총장이던 장도영은 20대에 사단장, 30대에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불과 3살 연하였던 김종필은 줄곧 중령에 머물렀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청년 장교들 중 일부는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계속된 군의 부정부패와 비리, 승진 중단 등에 불만을 품고 4·19 혁명 후 정군운동(整軍運動)을 일으켰다. 정군운동은 송요찬 참모총장, 백선엽 대장 등의 자진 사퇴 발표 등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미군 당국과 충돌을 빚었고 결국은 흐지부지되었다.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장교들이 1961년 5월 말 강제 예편당할 상황에 처했고, 이들은 육군 소장 박정희와 이미 그해 2월 강제 예편당한 김종필 등과 함께 정변 계획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일부 정군파 장교 집단이 쿠데타 모의를 시작한 것은 1960년 가을이었다. 이들은 1960년 9월 10일 ‘충무장 결의’를 통해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더 이상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킬 수 없음을 확인하고 쿠데타를 결의했다. 김종필 중심의 영관급 장교들은 박정희 세력과 결합해 쿠데타의 핵심 주도세력을 형성하고 본격적인 세 규합에 나섰다. 당시 장면 정부는 고양되고 있는 사회운동을 군사력을 활용한 물리적 탄압의 방식으로 돌파하려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비둘기 작전’이라는 폭동진압 계획을 준비했는데, 쿠데타 주도세력은 장면 정부의 의도를 역이용하여 폭동진압 작전에 동원될 서울 근교 부대들의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했다. 그 결과 육군 제6관구사령부, 육군 제33사단, 육군 제34사단, 육군 제12야전공병대, 육군 제1공수단과 육군본부·국방부의 중견 장교들을 다수 쿠데타 세력으로 포섭했다.

쿠데타 계획은 1961년 3월 즈음 본격적 실행 단계로 접어들었다. 쿠데타 주도세력이 포섭한 장교 40여 명이 핵심 세력을 형성했고, 이들은 박정희와 함께 1961년 4월 6일 명동 양명빌딩에 모여 쿠데타 참가를 맹세했다. 처음 계획은 1961년 4월 19일 4·19혁명 1주기에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시내로 진입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학생들의 우려로 이날의 시위는 조용히 지나갔고 쿠데타 세력은 다시 5월 12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사전 정보 누설로 수포로 돌아갔고, 결국 이들은 4일 후인 5월 16일 쿠데타를 감행했다.

[군사정변의 실행 : 한강인도교 총격전]

1961년 5월 16일 새벽, 2군 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장교 250여 명과 사병 3,500여 명으로 구성된 쿠데타 세력이 한강대교를 통해 도강을 시도했다. 한강대교는 현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에서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을 잇는 교량으로, 한강에 놓인 최초의 인도교(人道橋)였다. 1916년 착공되어 1917년 준공된 한강대교는 당시 서울 시내로 진입할 수 있는 유일한 다리였다. 이 다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교량 일부가 파괴되어 1957년 1월부터 복구공사에 착수, 1958년 5월에 준공되었다.

쿠데타군은 해병 제1여단장 김윤근 준장의 지휘 아래 해병대가 출동한 것을 시작으로 공수단은 박치옥(朴致玉) 대령, 제6군단 포병대는 군단 참모 홍종철(洪鍾哲) 대령과 문재준(文在駿) 대령, 제933대대는 구자춘(具滋春) 대령, 제822대대는 백태하(白泰夏) 중령, 제911대대는 김인화(金仁華) 중령에 의해 각각 출동하였다. 이준섭 대위가 이끄는 해병여단 제2중대가 맨 처음 한강인도교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헌병이 구축한 3중의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제1선 바리케이드는 인도교 남단에 트럭 2대를 八자형으로 배치하여 다리를 메우고 헌병 20여 명 가량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제2선 바리케이드는 트럭 3대, 제3선 바리케이트는 트럭 4대로 이루어졌다. 이준섭 대위는 ‘혁명군’임을 알리고 인도교 바리케이드의 철거를 요청했다. 하지만 헌병 중대장 김석률 대위는 참모총장의 지시로 통과를 거부했고, 김윤근 여단장은 그대로 밀어 버리라고 명령했다.

결국 헌병들의 위협 사격이 시작되었고 헌병과 해병대의 총격전이 펼쳐졌다. 제1선 바리케이드를 파괴한 후 제2선 바리케이드는 트럭 헤드라이트 불빛에 집중 사격을 가함으로써 제거했다. 이때는 한강대교의 절반을 지난 터라 해병대는 용산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박정희 소장 역시 차에서 내려 한강대교를 걸어서 건너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총격은 위협 사격에서 무차별 사격으로 바뀌었다. 최종 저지선인 제3선 바리케이드에 도달하자 4대의 트럭 좌우 측에서 헌병 40여 명이 매복하여 사격을 가했다. 제3선에서의 사격전이 가장 격렬했다. 해병대에서 부상자들이 속출하여 이준섭 대위를 비롯해 7, 8명의 사병들이 총상을 입었다.

제3 저지선의 교전으로 쿠데타군의 전진이 1시간 가량 지체되었다. 제1대대장 오정근 중령은 해병대 제1중대로 하여금 제2중대와 임무를 교대하여 선두에 나서도록 명령하였다. 제1중대와 헌병대의 교전이 다시 시작되었고, 결국 제3선 바리케이드를 이루고 있던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해병들의 직격탄에 파열되며 한강 인도교의 불빛이 완전히 꺼졌다. 헌병들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인도교는 다시 암흑 세계로 변했다. 이때가 새벽 4시경이었다. 바리케이드가 뚫리자 해병들과 그 뒤를 이어 공수단 병력이 한강을 건넜고, 헌병대 김석률 대위는 서울방첩대에 있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해병대에 이어 공수단이 다리를 건너 육군본부 쪽으로 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한편 한강인도교에서 해병대와 헌병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해당 지역을 담당하던 용산경찰서는 총성을 단순 오발 사고로 생각했다. 총소리가 계속되자 시민들의 문의 전화가 쇄도했으나 총성의 진원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3시 40분쯤 북한강파출소로부터 해병들이 육군 헌병들과 충돌하여 인도교를 포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용산서는 이것조차 단순 사고로 생각했으며, 3시 50분쯤 수면 중 유탄을 맞고 부상을 당한 한 주민이 실려 오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4시 정각이 약간 지나 해병대가 경찰서로 들이닥칠 때까지 용산서 관계자들은 상부로부터 아무런 지시도 받지 못했다.

[혁명공약 발표와 국가재건최고회의 출범]

도강에 성공한 쿠데타군은 조용히 서울 시내로 진입해 중앙청을 접수했다. 해병대 1개 소대는 남산, 서울방송국을 점령했다. 서울이 점령되자 쿠데타군은 지방 주요 도시인 대구·부산·광주·대전 등지를 별 어려움 없이 장악했다. 쿠데타군은 이날 오전 5시 서울중앙방송국 첫 방송을 통하여 “군부가 궐기한 것은 현 정권과 기성 정치인에게 더 이상 국가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백척간두의 위기에서 방황하는 국가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6개 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①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②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③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④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기울인다.

⑤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의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⑥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렇게 하여 쿠데타에 성공한 후 쿠데타 주체세력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장에는 장도영이 추대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8일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정권을 인수받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6월 6일 제정된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 의해 최고통치기구로 법적 기능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5월 20일 내각을 구성해 군사정부를 출범시켰다. 내각 수반은 장도영이 겸임했다. 이렇게 하여 쿠데타 세력은 군정의 법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리고 7월 2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을 반혁명사건으로 체포하고 다음날 박정희가 의장직에 오름으로써 명실상부한 쿠데타 권력을 완성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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