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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59
한자 團練使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오기승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995년연표보기 - 단련사 설치
폐지 시기/일시 1005년 3월연표보기 - 단련사 폐지
성격 지방관

[정의]

고려 전기 현재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부 영역을 포함한 지역을 관할하던 지방관.

[개설]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서부 영역에 위치한 대방동, 신대방동, 상도동 영역은 본래 고구려의 잉벌노현(仍伐奴縣) 영역에 속해 있었다. 잉벌노현은 8세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곡양현(穀壤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동쪽으로 연접한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 초에 율진군금주(衿州, 黔州)로 개칭되었으며 995년(성종 14)에 지방관으로서 금주단련사(衿州團練使)를 두었는데, 1005년(목종 8)에 단련사 제도가 혁파되면서 금주단련사도 소멸하게 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중국 당(唐)나라에서 안사(安史)의 난 이후 지방제도를 군사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절도사(節度使)를 중심으로 관찰사(觀察使)·단련사(團練使)·방어사(防禦使) 등을 편성하였던 바 있다. 고려의 성종은 이를 도입하여 995년(성종 14)에 일찌기 983년(성종 2) 당시 12목(牧)이 설치되었던 12주(州)에 각각 절도사를 파견하는 한편, 기타 여러 주와 부(府)에 단련사·도단련사(都團練使)·자사(刺史)·관찰사·방어사를 두도록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서부 영역을 포함하고 있는 금주에도 단련사가 설치되었다. 단련사의 설치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아울러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한 군사적 목적을 겸한 것으로 풀이된다.

[담당 직무]

단련사가 설치된 지역은 총 11주로, 당시의 고려 10도 중 관내도(關內道)의 포주(抱州)·수주(樹州)·금주·죽주(竹州), 삭방도(朔方道)의 교주(交州)·춘주(春州)·동주(東州)·장주(漳州)·등주(登州)·명주(溟州)·척주(陟州)였다. 관내도는 서북 국경인 패서도(貝西道)의 바로 남쪽에 연접하면서 수도를 포함하는 지역이며, 삭방도의 단련사 파견지는 후일 국경지대인 동계(東界)로 편입되는 지역이 다수 있다. 또한 당의 제도에서도 단련사는 주로 절도사가 없는 주에 설치되어 군사를 관장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려의 단련사 또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비정된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56, 지10, 지리1, 양광도, 『고려사』 권77, 지31, 백관2, 외직,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2, 목종 8년 3월조에 단련사 관련 기록이 있다.

[변천]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부 지역을 포함하는 금주의 지방관으로는 995년(성종 14)에 단련사가 설치되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혁파되었다. 이후 금주는 1018년(현종 9)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의 수주에 내속되었는데, 1172년(명종 2) 금주에 감무(監務)가 임명되면서 다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의의와 평가]

단련사 설치를 포함한 995년(성종 14)의 군현제 개혁은 대체로 당제를 모방한 유교적 중앙집권책으로서 지방 통제와 군사적 감찰기능을 아울러 갖추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단련사를 비롯하여 같은 시기에 설치된 관찰사·도단련사·자사 등은 모두 10년 후인 1005년(목종 8)에 혁파되는데, 이는 중앙행정력이 지방에 침투하기 어려웠던 현실, 혹은 고려의 지방관제가 군사 감찰적 성격에서 행정적 성격을 띠는 형태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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