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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17
한자 金泳三大統領 私邸
이칭/별칭 김영삼가옥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매봉로2가길 11[상도동 7-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혜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69년연표보기 - 김영삼대통령 사저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6년 9월~1998년 2월 - 김영삼 대통령 퇴임 후 사저로 복귀하기 위해 경호동의 신축 및 기존 건물의 증개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7년 12월연표보기 - 김영삼대통령 사저 서울미래유산 지정
현 소재지 김영삼대통령 사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매봉로2가길 11[상도동 7-6]지도보기
성격 단독주택
양식 철근 콘크리트조 양옥
소유자 김성민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의 사저.

[개설]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위치한 김영삼대통령 사저는 ‘서울미래유산 김영삼가옥’[인증번호 2017-004]으로 지정된 대통령 가옥이다.

김영삼대통령 사저김영삼(金泳三)[1927~2015] 전 대통령이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동에서 1969년 봄에 이사한 후 2015년 생을 마칠 때까지 줄곧 거주했던 곳이다. 1969년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약하던 김영삼에게 부친 김홍조가 구입해 준 2층 양옥집이다. 김영삼은 이후 46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았는데, 상도동을 장기간 떠났던 시기는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선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어 거처를 청와대로 옮겼던 1993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 24일의 5년뿐이었다.

[역사적 사건과 기념물]

김영삼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총선에서 만 25세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1969년까지도 4선 의원이자 신민당 원내총무로 정치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 반대투쟁을 주도하다가, 1969년 6월 20일 밤 10시 5분경 집으로 돌아가던 중 집 앞 골목에서 초산테러, 즉 질산 테러를 당하였다. 골목에서 소란을 피우던 청년 3인은 김영삼의 크라운 자동차를 세웠고, 그 중 한 청년이 그가 앉은 차 뒷자리의 문을 열려 시도하였다. 다행히 차문은 잠겨 있었고 운전사는 다시 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이에 청년은 주머니에서 질산이 담긴 병을 꺼내 차에 던졌고, 병이 깨지며 뿌려진 질산으로 인해 승용차의 페인트가 녹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인명 피해 없이 넘겼으나, 질산에 직접 노출되었다면 사망 또는 중상을 입을 수 있는 심각한 테러 사건이었다.

김영삼이 질산테러를 당했던 장소에는 2019년 6월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가 설치한 지름 40㎝의 동판이 바닥에 설치되어 있다. 동판은 김영삼의 손녀인 김인영 작가가 디자인하였는데, 동판에는 ‘3선개헌 반대투쟁을 이끈 김영삼 의원에 대한 초산테러 현장 1969.6.20. 22:05 정의·진리·자유를 위한 민주화 투쟁의 시작점’이라고 쓰여 있다.

[위치]

김영삼대통령 사저는 2020년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매봉로2가길 11[상도동 7-6]에 위치하고 있다.

[변천]

김영삼대통령 사저의 2020년 현재의 모습은 1969년부터 김영삼과 가족이 거주했던 당시의 모습이 아니며, 대통령 퇴임을 즈음하여 증개축한 형태를 하고 있다. 본래 1996년 8월까지 현재의 자리에 있던 주택은 지상 2층, 지하 1층의 양옥이었다. 당시 지하 1층은 주방으로 사용하였고, 1층에는 소파가 있는 응접실, 2층은 안방과 자녀의 공부방 등이 있었다. 이 주택은 붕괴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1997년 9월 초부터 재건축에 들어갔다.

이때 신축된 사저는 연면적 322.74㎡, 건축면적 158.38㎡의 2층 단독주택으로 층별 면적은 지하1층 57.55㎡, 지상1층 154.27㎡, 지상2층 110.92㎡이다. 의전건축사에서 설계하고, 중앙산업개발이 공사를 맡았다. 건축 비용은 당시 평당 4백만원, 총 비용 4억원으로 추정되며, 사저의 공사비는 전액 사비로 충당되었다.

한편 사저의 신축과 함께 추진된 것이 경호시설의 설치였다. 대통령경호실법에 따라 전직 대통령에게는 7년 간 경호경비를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에서는 1997년 사저 인근의 민가 두 채를 매입하였다. 이 가운데 한 채[상도1동 7의 5, 약 545.5㎡]는 철거하여 경호요원의 사무실 및 차고를 신축하였고, 다른 한 채[상도1동 7의 28, 약 337.2㎡]는 개보수를 통해 경호요원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현황]

2011년 1월 김영삼은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헌납하기로 결정하였고, 김영삼대통령 사저 또한 이때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로 기증하였다. 그러나 김영삼민주센터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사저의 매각이 추진되었다. 이후 김영삼의 손자인 김성민이 2017년 2월 구입하여 유족이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역정을 함께 한 김영삼대통령 사저는 단순히 김영삼이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사적인 장소가 아니다. 민주화 성지로 평가될 정도로 한국 현대정치사의 고락을 함께했던 역사적 현장이다. 김영삼은 이 자택에서 두 번의 연금을 당하였는데,1차는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다가 1980년 5월 20일부터 1981년 5월 1일까지 자택에 구금되었다. 이어 1년 뒤인 1982년 5월 31일부터 1983년 5월 30일까지 2차 가택연금을 당하였다. 김영삼은 이 기간 중에 5·18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을 맞아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여 23일간 지속한 바 있다.

한편 ‘상도동계’라 불리던 김영삼의 정치세력은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더불어 한국의 정당정치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온 세력으로 활약하였다. 그 결과 상도동김영삼대통령 사저는 유력 정치인의 산실이 되었고, 그와 동시대를 살았거나 뒤를 이어 활약했던 대다수의 정치인이 상도동을 드나들었다. 김영삼은 주로 1층 거실에서 정치인들을 만났는데 소파 뒷벽에는 자신이 쓴 휘호를 바꿔 가며 걸어 두고는 했다. 김영삼은 주요 시기마다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구상을 담은 휘호를 즐겨 써서 소위 휘호정치를 했다. 그가 썼던 휘호 중에는 대도무문(大道無門), 극세척도(克世拓道), 경천애인(敬天愛人), 호연지기(浩然之氣), 무신불립(無信不立), 정자정야(政者正也), 송백장청(松柏長淸) 등이 있다.

김영삼대통령 사저를 찾은 것은 정치인만이 아니었다. 국내외 언론인, 각국 외교사절은 물론이고 노동자와 같은 일반시민까지도 김영삼을 만나기 위해 사저의 문을 두드렸다. 이로 인해, 김영삼대통령 사저는 주한미국대사 등의 외교사절 면담, 정치인의 회합 장소, 내외신 기자와의 회견 장소로 활용되었고, 김영삼의 도움이 필요하거나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농성을 벌이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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