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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26
한자 權東鎭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장경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 12월 15일연표보기 - 권동진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2년 10월 - 권동진 사관학교 입학
활동 시기/일시 1895년 12월 - 권동진 일본 망명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권동진 귀국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권동진 민족대표 33인에 선출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권동진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29년 - 권동진 신간회 집행위원장 선출
몰년 시기/일시 1947년 3월 9일연표보기 - 권동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권동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권동진 출생지 -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간회 집행위원장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독립운동가.

[개설]

권동진(權東鎭)[1861~1947]은 천도교인으로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한사람이자, 신간회에 관여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벌였다.

[가계]

권동진의 증조부는 권필이며, 조부는 권재형이다. 백부는 권재용이고, 셋째형은 권용진, 다섯째형은 권형진이다.

[활동 사항]

권동진은 1861년 충청북도 괴산군 소수면 아성리 안심마을에서 태어났다. 1869년 서울 재동으로 이사한 후 가문의 영향을 받아 1882년 일본이 세운 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들을 역임하다가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대원군과 함께 연루되어 1895년 12월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중에 손병희를 만나 인내천 사상을 접하게 되고 이어 동학에 입교하게 되었다.

권동진은 1906년 귀국 후 손병희와 함께 천도교 조직을 키우는 것에 기여하였다. 잠시 중추원 부참의를 맡았으나, 곧 사직하고 대한자강회의 후신인 대한협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계몽운동에 힘썼다.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권동진은 기독교, 불교 등 타 종교세력과 연합하여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을 했다. 독립선언 이후 일제에 의하여 즉각 체포되었고, 1921년에 출소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사망하자 천도교는 지도자를 잃고 신파와 구파로 분열을 거듭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구파의 정점에 서있던 권동진은 6·10만세 운동 당시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를 꾀하게 되었다. 이 운동 이후 권동진은 신간회 창립에 적극 기여하게 되어 신간회 부회장을 맡고, 1929년에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신간회가 해체되자 이렇다 할 활동을 하지는 않았으나, 해방 이후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힘썼다.

[저술 및 작품]

권동진의 저서로는 『천도교대헌』이 있다.

[묘소]

권동진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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