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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36
한자 南相悳
영어공식명칭 Nam Sang-deok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연표보기 - 남상덕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8월 1일 - 남상덕 일본군과 교전
몰년 시기/일시 1907년 8월 1일연표보기 - 남상덕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남상덕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출생지 남상덕 출생지 - 경상남도 의령군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군인
성별
대표 경력 참위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봉안된 개항기 군인.

[개설]

남상덕(南相悳)[1881~1907]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반대하여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를 이끌고 항거하였다.

[가계]

남철희(南哲熙)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활동 사항]

남상덕은 1881년 경남 의령(宜寧)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한국군에 입대하여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견습육군보병참위(見習陸軍步兵參尉)로 임관(任官)해 시위 보병(侍衛步兵) 제2연대 1대대에서 근무했다.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제 침탈의 불법성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구실로 1907년 7월 19일 고종황제가 강제 양위되었다. 8월 1일에는 아침 7시 대대장 이상 장교를 관저에 긴급 소집해 군부대신 이병무(李秉武)의 「군대해산조칙」 대리 낭독으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 사실이 공포되었다.

맨손으로 무예를 연습한다는 구실로 병사들을 무장 해제 시키고 오전 10시까지 훈련원(訓練院)에 집결하라는 명령에 제2연대 1대대 병사를 연병장에 정렬하여 훈련원으로 이동 준비했다. 그러던 중 제1연대 1대대 병사 3명이 제2연대 1대대로 달려와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參領)의 자결과 제1연대 1대대의 봉기 소식을 전하며 함께 일어날 것을 호소했다. 이에 시위대 제2연대 1대대 장병들의 훈련원 동원을 거부하고 무기고 및 탄약고를 점령하며 군대해산에 반대하는 항거에 나섰다.

시위대의 봉기에 일본군 제13사단 소속 보병 제51연대 3대대의 제9중대와 제10중대에서 차출된 각 1개 소대가 반격했다. 이에 맞서 시위 제2연대 1대대 병사들을 이끌고 우세한 무기와 증원된 병력으로 반격해 오는 일본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오전 8시부터 약 3시간 동안 병영을 지켰다. 하지만 일본군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 소좌(少佐)의 총공격 지시 아래 오전 10시 40분 일본군 제9중대를 지원하고자 제12중대장 가지하라[梶原義久] 대위의 증원부대가 투입되면서 병영이 3면으로 포위당했다. 결국 시위 제2연대 1대대는 탄환과 무기의 부족으로 10시 50분경 일본군에게 병영을 빼앗기고 병영 밖 시가에서 백병전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남상덕은 일본군의 총탄에 사망했다.

[묘소]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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