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03
한자 丁若鏞 送別 銅雀津
이칭/별칭 동작진(銅雀津), 동작도(銅雀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차인배

[정의]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위치하였던 조선 시대 동작나루다산 정약용의 일화.

[개설]

‘정약용을 배웅한 동작나루터’ 라는 제목은 1801년 다산 정약용이 기나긴 유배를 떠나는 심정을 동작강가에서 시로 읊은 데에서 기인한다.

전근대 시대 강과 바다는 단절의 공간이자 교통의 매개였다. 강변에 나루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에는 통상적으로 도하거리를 줄이기 위해 강폭이 가장 좁은 곳에 입지하였으나, 이후 점차 주요 교통로 상에 조성되었다. 나루는 강폭에 따라 도(渡), 진(津), 제(濟), 섭(涉) 등으로 불렸으나, 점차 그 구분이 모호해지고 현재는 하나의 지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한자표기로 포(浦)나 바다의 항(港)을 차용하기도 하였으며, 주요 군사시설이 운용되었을 때는 진(鎭) 혹은 진(陣)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나루는 여행자의 나들목이자, 교역장이며, 국가 명령의 통신기관이었고, 군사적 기능을 겸하였다. 또 조세수취를 위한 조운(漕運)의 근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에서는 진도(津渡)를 국가차원에서 설치 관리하였다. 고려조에 한강에는 조강도, 낙하도, 양화도, 사평도, 용진 등이 설치되었는데, 조선이 한양으로 도읍하면서 한강경강(京江)으로 불리며 그 중요성이 증대되었다. 세종 대에는 중요 진(津) 혹은 도(渡)에 종 9품 도승(渡丞)을 책임자로 두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늠급위전(廩給位田)과 진척위전(津尺位田)을 지급하여 자급운영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한강에는 도미진, 광진, 송파진, 삼전도, 신천진, 독도진, 입석포, 두모포, 한강도, 서빙고, 동작진, 흑석진, 노량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진, 양화도, 공암진 등 20여 개의 나루가 설치되었고, 시기에 따라서 각 나루는 진(津) 혹은 도(渡)로 혼재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한강 나루 중 국가가 관리하는 진도를 11개소로 열거하고 있으나, 교통수요 등에 따라 그 수는 가감되었다.

동작진도 조선 중후기 노량진의 이용수요가 급증하게 되면서 진도 관리체계로 편입되었다. 인근 노량, 양화 등이 도(渡)로 편재된 바는 있으나 동작나루동작도(銅雀渡)로 정식 편재된 바는 없다. 다만, 정약용동작나루를 이용했던 조선 묵객(墨客)들의 시문에 ‘동작도’의 표현이 다수 등장한다.

진도체계에 편입되면, 국가에서는 관선(官船)인 진선(津船)과 인원을 배치하게 되는데, 조선 후기 기록에서 그 수효를 살펴보면 광진 4척, 송파진 9척, 삼전도 3척, 신천진 2척, 양화도 9척, 공암진 5척, 철관진 1척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한강도와 노량도는 각 15척이 배치되어 두 나루가 가장 크고 통행량이 가장 많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한강도, 노량도의 수요를 분산하여 두 나루의 인근에 서빙고진과 동작진을 추가 설치하였다. 이에 따라 한강도와 노량도에서 각 5척을 새로 편입된 서빙고진과 동작진에 이동 배치하게 되었다.

동작진은 진도체계에 편입되기 이전에도 사선(私船)이 운행되던 나루였다. 한강에는 국가가 직접관리 운영하는 진도(津渡) 외에도 민간이 운임을 받고 도강을 해주는 나룻배 나루들이 많이 있었는데, 동작진도 그 중 하나였다. 관에서 운행하는 진선은 무료로 이용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기찰이 심하고, 또 일부 관원들의 횡포가 있어, 사람들은 돈을 지불하고서라도 민간 나룻배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까닭이다. 또 동작나루는 남태령을 지나 과천, 수원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경로였기에 이용자들이 많았고, 현재 현충원이 위치한 동작진 언덕에는 관사(館舍)를 비롯해 많은 여관들이 운영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간 동작나루에는 그 만큼이나 많은 사연들이 있었을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풍운의 꿈으로 오르는 상경길이였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부임지로 가는 통과역이었을 것이며, 또 어떤 이에게는 낙향의 길이었을 것이다.

교산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조관기행(漕官紀行)」편에는 1601년(선조34) 조운(漕運)을 감독하는 전운판관(轉運判官)이 되어 전라남도로 남행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허균은 조정을 하직하고 바로 동작포(銅雀浦)를 건넜다고 기재하였다. 아마도 허균은 동작진을 건너 남태령, 화성을 지나 남행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남행하는 관리들의 일반적 여정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였던 이덕무(李德懋)와 박제가(朴齊家)도 동작나루에서의 감응을 ‘동작진(銅雀津)’, ‘새벽 동작강을 건너며[曉渡銅雀江]’라는 시문으로 남긴 바 있다. 두 시문은 공통으로 동작강 변에서의 한가로움과 풍류를 담고 있다.

그런데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에게 있어서 동작나루는 그야말로 애절한 공간이었다. 정약용이 그의 일생 중요기간에 동작나루에서 남긴 다섯 편의 시문은 그의 다단했던 일생을 담고 있는 듯하다.

동작도(銅雀渡)〈시굴감시(時屈監試) 영내부화순(領內赴和順) 구월야(九月也) 여삼동행(汝三同行)〉[동작나루〈이때 감시(監試)에 낙방하고 아내와 함께 화순으로 갔다. 9월, 여삼(汝三)과 함께였다.〉]

동작추풍기(銅雀秋風起)[동작나루에서 부는 가을바람에]

오성억묘연(烏城憶杳然)[화순[烏城]의 지난 추억이 아련하다]

관재청죽리(官齋箐竹裏)[관아의 서재는 대나무 숲이고]

서실국화전(書室菊花前)[내 서재는 국화꽃 앞이니]

달축수양안(遠逐隨陽雁)[철에 따라 나는 기러기 멀리 따라]

서회범학선(徐回汎壑船)[천천히 물길 따라 배를 돌리네]

여유비불락(旅游非不樂)[여행이 어찌 즐겁지 않으련만]

행매념친년(行邁念親年)[부모 연세 염려되어 길을 재촉하네]

「동작도」라는 이 시는 정약용이 18세인 1779년(정조 3) 9월에 쓴 것으로, 9월 1일 성균관 감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아내와 함께 부친 정재원(丁載遠)의 임지인 전라도 화순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양을 떠나는 감응을 적은 것이다. 동작진의 한가로운 풍광과는 달리, 과시에 낙방하고 연로한 아버지께 돌아가는 복잡한 심경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동작도송별가군환진주(銅雀渡送別家君還晉州)[동작진에서 진주(晉州)로 돌아가는 아버지를 송별하다]

도구이주원(渡口移舟遠)[나루 어귀에서 멀리 떨어지는 배]

사두립마간(沙頭立馬看)[모래사장에 말 세워두고 바라본다]

빈조회모경(鬢凋懷暮景)[흰머리 늙어진 몸 가슴 아프고]

구박념춘한(裘薄念春寒)[입으신 얇은 옷은 봄추위에 염려스럽네]

묘묘번화개(杳杳飜華蓋)[어둑어둑 꽃 빛이 비치는데]

초초대벽만(迢迢對碧巒)[푸른 산은 멀기만 하네]

교전일배주(轎前一杯酒)[가마 앞에서 한 잔 술은]

응위별리난(應爲別離難)[응당 이별이 어렵기 때문이리라]

1792년(정조 16) 정월, 한양에서 다시 임지인 진주로 돌아가는 부친 정재원과 작별하는 송별시이다. 부친을 향한 애절한 감응은 이내 마지막 송사가 되었고, 아버지가 탄 배를 바라보며 강변에서 올린 술은 마지막 한잔 술이 되고 말았다. 불과 석 달 뒤인 4월 9일 정재원이 진주에서 작고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9년 뒤[1801] 동작나루정약용에게 또 다시 처절한 아픔과 헤어짐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그는 이미 자신과 형제들의 암울한 미래를 짐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도동작진작(晩渡銅雀津作)[해질녘 동작나루를 건너며 짓다]

동작사일낭화번(銅津斜日浪花翻)[해 저무는 동작나루 출렁이는 물결]

선미종남시고원(船尾終南是故園)[멀어지는 남산은 그리운 옛 동산]

수류야교유백우(垂柳野橋猶白雨)[드리운 수양버들 비에 유독 희고]

담연성궐근황혼(澹煙城闕近黃昏)[연기 피어나는 성 궁궐은 황혼에 젖네]

금문대조비장책(金門待詔非長策)[금문에서 부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대책이 아니고]

수역투황야성은(水驛投荒也聖恩)[물가 역참으로 보내시는 것도 성은이다]

문설서인미불오(聞說西人迷不悟)[듣자하니 서인들의 미혹함을 깨닫지 못했기에]

차행환이출회번(此行還似出淮藩)[이 길은 먼 물가로 쫓기는 것과 같다고 한다]

다산은 1793년(정조 17) 거중기 등을 설계하며 수원성을 완성하고, 1795년(정조 19) 2월 24일에는 노량진 주교(舟橋)[배다리] 공사에 참여하여,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겸한 전무후무한 대규모 원행을 가능하게 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 해 7월 주문모(周文謨) 신부의 입국사건에 둘째 형인 정약전(丁若銓)[1758-1816]이 연루되자, 정약용도 연좌되어 충청도 금정(金井)[현재 충청남도 홍성군]의 미관말직으로 좌천되었다. 다산은 해질 무렵 동작나루의 쓸쓸한 모습이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를 자신의 미래와도 닮아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서학(西學)[천주교]에 연루되어 귀양 아닌 귀양을 떠난다는 마지막 구절은 그와 형제들의 암울한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다산노량진배다리를 설계하고, 수원 화성(華城) 건설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등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정조의 지지와 총애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급서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게 되었다.

정조 사후 아들 순조가 보위에 올랐다. 하지만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영조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면서 1801년(순조1) 2월 천주교에 대대적인 검속이 진행되어 많은 인사들이 체포되었다. 이른바 신유사옥(辛酉邪獄, 辛酉迫害)이다. 이 과정에서 정약용의 형제들 모두가 국문을 받게 되었는데, 매형인 이승훈(李承薰)[1756-1801]과 막내 형인 정약종(丁若鍾)[1760-1801]은 서대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고, 둘째 형인 정약전과 본인은 신지도(薪智島)와 장기현(長鬐縣)으로 각각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경안(驚雁)[놀란 기러기]

동작진서월사구(銅雀津西月似鉤)[동작나루 서쪽으로 달은 갈고리를 닮았고]

일쌍경안도사주(一雙驚雁度沙洲)[한 쌍의 기러기는 놀라 모래톱을 건넌다]

금소공숙노중설(今宵共宿蘆中雪)[이 밤 갈대 밭 눈 속에서 함께 자겠지만]

명일분비각전두(明日分飛各轉頭)[내일이면 머리를 돌려 각각 날아가겠지]

이 시는 친족들을 잃고 유배지로 떠나는 정약용의 복잡한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이 날 동작나루는 그에게 한양과의 이별이었고, 과거 영광과의 이별이었으며, 형제, 처자와의 이별이었을 것이다[이 시는 11월 두 번째 유배 길 과천에서 유숙하며 쓴 것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이 해 9월 교회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황사영(黃嗣永)이 조선의 천주교 박해사실을 비단에 빼곡하게 적어 청(淸)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를 통해 서양에 알리려던 백서(帛書)사건이 발생한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첫 째 형인 정약현(丁若鉉)[1751-1821]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약전과 약용 형제는 다시 압송되어 국문을 당하게 되었다. 2월 말 떠난 한양에 10월 다시 돌아오게 된 것이다. 홍낙안과 이기경 등 노론벽파 인사들은 이들의 사사(賜死)를 주장했으나, 황사영이 사형당한 11월 5일 정약전은 나주의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형이 확정되었다. 두 형제는 함께 한양을 출발하여 유배지로 향했고, 이때 또 다시 동작나루를 지나게 되었다.

야과동작도(夜過銅雀渡)[밤중에 동작나루를 지나다]

청파역전천정흑(靑坡驛前天正黑)[청파역 앞 하늘이 정말로 흑색이고]

일미잔월몽무색(一眉殘月濛無色)[눈썹 한 치만큼 남은 달은 흐릿한 색도 없다]

한사책책향마제(寒沙策策響馬蹄)[얼어버린 모래사장에 저벅저벅 말발굽 소리]

삭풍급급취안익(朔風急急吹雁翼)[삭풍은 급급하게 기러기 날개에 불고]

유시격선빙활고(流澌擊船氷滑篙)[유빙은 뱃전을 쳐 미끄러지고]

고공각립수지직(篙工却立愁指直)[사공은 물러서 손가락 곱을까 걱정한다]

홍파탕선성전웅(洪波蕩漾聲轉雄)[거센 파도 출렁출렁 소리 점점 높아지고]

완교용약흔욕득(頑蛟踊躍欣欲得)[교룡은 펄쩍펄쩍 제때라고 뛰어들 듯]

삼성욱욱두병찬(參星煜煜斗柄燦)[삼성은 반짝반짝 북두칠성 빛나고]

망각삼소환북극(芒角森昭環北極)[별빛은 뻗어 북극성 주위에 둘러있지만]

수기처미장산곽(水氣凄迷障山郭)[물 기운은 서늘하고 산은 첩첩으로 막혀]

회수종남누첨억(回首終南淚沾臆)[머리 돌려 남산을 보니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두 사람은 11월 21일 전북 나주의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러 하룻밤을 유숙하고, 이튿날 아침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두 형제는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정약전은 15년 뒤인 1816년 흑산도에서 눈을 감았고, 정약용은 1818년 해배(解配)가 될 때까지 17년 유배 생활을 지속했다.

이렇듯 사연 많은 동작나루한강에 다리들이 설치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동작나루 지역은 조선 시대에 경기도 과천현, 일제시대에 경기도 시흥군, 경성부 영등포에 속하였다가 1946년 이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관악구 관할을 거쳐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속하게 되었다. 현재 국립 현충원, 길 건너편 동작역 4번 출구 인근에는 동재기 나루터였음을 알리는 표석이 서있는데, 나루터의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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