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왕실을 잇게 한 창빈 안씨와 동작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007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장경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내 좌측 언덕에 있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의 무덤.

[동작동 주인 창빈 안씨]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에 있는 국립현충원 좌중간 언덕배기에는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 왕가의 무덤 하나가 있다. 현충원의 수많은 참배객들은 안내 표지판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스산한 옛 무덤을 그냥 지나칠 뿐, 눈길도 별로 주지 않는다. 그나마 눈썰미 있는 몇 몇 사람들만이 계단으로 올라와 “국립현충원 한복판에 웬 조선 시대의 후궁 묘냐?”라고 의아해 하며, 약간의 관심만 나타낼 뿐이다.

그러나 이 무덤의 주인공이었던 창빈 안씨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궁중 여인은 아마 없을 듯하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궁녀가 되어 입궁했다가 꽃다운 나이 스무 살에 중종 임금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을 입은 후 후궁의 자리에 올랐고, 그녀의 손자였던 하성군이 방계로 왕위를 계승하여 14대 임금 선조로 즉위하면서 조선 후기 왕가 혈통의 맨 꼭대기에 자리 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창빈 안씨는 조선조 11대 왕인 중종의 후궁으로 있으면서 선조의 아버지였던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을 낳았기에 후일 내명부의 최고 벼슬인 정1품 빈으로 추증되었다. 이 모두가 그의 손자였던 하성군이 왕위의 대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이런 상황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종을 중심으로 한 가계도와 당시의 정치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복잡한 중종대왕 가계도]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사이에 태어났다. 성종의 치세에서 왕위를 이은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자 박원종을 비롯한 반정세력들이 진성대군을 옹립함으로써 11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중종의 첫번째 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이 진성대군으로 있을 당시 결혼하여 부부인으로 책봉되었고 중종이 즉위하자 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친정 아버지였던 익창부원군 신수근이 매부였던 연산군을 위해 중종반정을 반대했기에 반정세력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에 따라 역적의 딸을 그냥 둘 수 없다는 논리로 강제 폐위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중종은 두번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를 맞아들였는데, 세자[후일 12대 임금인 인종]의 출산과정에서 얻은 산후병으로 이내 죽음을 맞이했다. 이어 세번째 왕비인 문정왕후 윤씨가 궁에 들어와 안주인을 차지하면서 경원대군과 공주 넷을 낳게 되었고, 경원대군이 바로 제13대 임금인 명종이었다.

[후사 없이 죽은 명종의 후계자는?]

명종의 비는 인순왕후 심씨였다. 인순왕후 심씨는 1532년(중종 27) 5월에 아버지 심강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 큰 딸로 태어나, 열두 살 때 경원대군과 혼인하여 부부인이 되었고, 2년 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인순왕후 심씨가 순회세자를 낳기는 했으나, 세자 나이 13세에 요절한 이후 후사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고, 게다가 후궁들까지 왕자를 둔 이가 없었다.

아들이 없던 명종은 평소에 이복동생이었던 덕흥군의 아들들을 자주 궁으로 불렀는데, 하루는 세 명의 조카들에게 익선관을 가리키며 “머리가 얼마나 크고 작은지 알아보기 시험이니 차례로 한번씩 써보라”고 하자, 선조의 두 형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하였으나, 막내인 선조가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함부로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라며, 공손하게 받들어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덕흥군의 3남이었던 하성군이 명종의 신임을 얻고는 있었지만, 후사로 낙점까지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명종의 병세가 악화되자 후사 문제는 오히려 인순왕후 심씨가 더 적극적이어서, 작은할아버지 심통겸과 상의한 끝에 명종이 총애하던 덕흥군의 셋째 하성군을 양자 후보로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명종이 한때 위독하자 하성군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전교를 인순왕후 심씨가 주도하여 작성하기도 했지만, 병석에서 일어난 명종이 “후계자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라”는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야사에서는 명종이 어머니 문정왕후에게 받은 스트레스와 무수리 출신 장씨와의 지나친 방사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자신의 핏줄을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다.

당시 왕실의 법도를 따진다면 인종 비인 인성왕후 박씨가 인순왕후보다 더 높은 왕실 어른이었다. 따라서 후계 결정권이나 수렴청정은 당연히 인성왕후의 몫이었다. 그런데 명종이 즉위한 초기에 소윤세력들이 일으킨 을사사화로 인해 대윤세력들이 절멸 당했으니, 인성왕후 역시 멸문의 멍에를 쓴 뒷방 늙은이에 불과했다. 명종이 위독한 상태에서 후사문제가 대두했을 때 일부 조정대신들의 인성왕후가 후사를 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당시 실세였던 영의정 이준경이 인순왕후 심씨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권력에 대한 야욕을 가진 그녀의 친정 입김 또한 부인할 수가 없다.

선조의 등극으로 수렴청정을 하게 된 인순왕후는 문정왕후의 실정을 반면교사 삼아 가급적 직접 정사에 나서지 않고 조정 대신들의 의견에 묻어가는 편이었다. 아울러 그녀는 친정 이익을 대변하기는 했지만 그것을 국사보다 위에 놓지는 않았는데, 척신 윤원형과 가까웠던 작은 할아버지 심통원의 관직을 삭탈한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러는 사이에 삼정승이 조정을 잘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국사에 익숙해져 간 선조가 버티고 있었기에 곧 섭정을 거두어들였으니, 이제는 선조의 친정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몇 차례의 사화로 피해를 입었던 사림 세력들이 속속 복귀하여 중앙에 포진하고 있었기에, 외척 중심의 척신 정치가 사라지고 사림 세력이 중심이 된 붕당정치 시대가 도래 했다. 이는 곧 신권 중심의 정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정국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튼 명종이 후사를 두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했고, 이를 계기로 선조가 조선의 14대 왕으로 등극했다. 이방원 혈손들의 막은 내렸고, 조선조 방계 승통 360년 역사의 시작을 알렸다. 일개 궁녀출신이었던 창빈 안씨 혈손들의 시대가 활짝 열린 것이었다.

[창빈 안씨의 삶과 죽음]

창빈 신도비에 의하면, “몸가짐이 조심스러웠으며 부덕을 순수하게 갖추었다. 중종의 은혜를 입은지 거의 30년을 시종 얌전한 태도에 게으름이 없었고, 궁중에서는 누구에게나 환심을 얻었다. 게다가 일을 가려보는 안목이 있어서 사람의 길흉과 일의 성패를 예언하면 거의 다 들어맞았다. 자녀를 가르칠 때는 반드시 의방(義方)을 따라서 곡진하게 타일렀다. 또 능히 생사의 이치를 알아서 평소 신에게 비는 일이 없었다. 일찍이 옷과 이불을 지어서 상자에 담아두고 겉에다가 ‘염구(斂具)’라고 써놓아 죽은 후의 장례에 대비하였으니 빈의 식견이 이와 같았다.”라는 평에서 보듯, 창빈은 일생동안 몸가짐을 궁중 법도에 맞춰 몸소 실천에 옮기려는 자세를 견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산 안씨였던 창빈은 1499년(연산군 5) 아버지 증(贈) 우의정 안탄대와 어머니 증 정경부인 황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산 출신이었던 아버지 안탄대의 당초 벼슬이 정7품 무관 품계인 적순부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그의 가문을 짐작케 한다. 특히 안탄대의 생몰년이나 선조와 가계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니, 비록 중종의 장인이었다 할지라도 선조가 즉위한 후 창빈으로 봉작되기까지의 한미한 가세가 이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창빈 안씨는 1507년(중종 2) 9세의 나이에 궁녀로 입궁하여 성종의 비이자 중종의 어머니였던 정현왕후 침방나인으로 시봉하고 있었는데, 정현대비가 특별히 돌보고 사랑하여 경서와 사기를 내려 주었다고 했으니, 왕실의 법도와 후궁으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518년(중종 13) 20세에 임금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고, 2년 후인 1520년 특별상궁이 되었는데, 특별상궁이란 궁녀 중에서 왕의 여자가 된 여인에게 신분을 격상시켜 붙여주는 호칭이었다.

창빈 안씨는 1521년(중종 16) 23세에 첫 아들 영양군 이거를 낳았고, 1526년(중종 21) 28세에 딸 정신옹주를 낳았다. 그 후 1529년(중종 24)이던 31세에 종4품 숙원으로 승진하였고, 그 이듬해인 1530년(중종 25)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군 초를 출산했다. 숙원으로 있을 당시 왕비가 견관(繭館)[왕비가 궁중에서 누에를 치던 곳]에서 일이 생겼는데 빈이 잘 주선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이 처리하자 궁중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1540년(중종 35) 42세에 종3품 숙용(淑容)에 올랐으니, 궁녀 출신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신분 상승이었던 셈이다.

1544년 중종이 재위 39년만에 57세의 일기로 승하하자, 인종이 대통을 이어받기는 했으나 후사를 놓고 벌이는 신경전은 꽤 깊을 수밖에 없었다. 문정왕후와 맞서던 경빈 박씨를 비롯한 후궁들이 대립각을 세우다 사약을 받은 왕자와 후궁들이 즐비한데, 창빈 안씨는 일찌감치 마음을 접고 사세에 순응하며 몸을 낮췄다. 이렇듯 조신한 처신으로 격동의 세월에서도 무사할 수 있었는데, 중종 승하와 인종 즉위를 전후하여 또 그런 위기가 또 찾아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창빈 안씨는 3남매를 불러놓고 “권력과 재물은 사람이 얻고자 해서 취해지는 것이 아니다. 때가 난세이니만큼 너희는 탐욕을 내려놓고 필부로 살아감이 마땅할 것이다. 모[角]가 나면 깎이는 법임을 명심하라.”고 눈물로 당부했다.

중종의 3년 복제를 마친 후 전례에 따라 궁 밖으로 나가기를 청했다. 선왕의 후궁들은 왕이 죽은 후 궐 밖의 거처로 옮겨 살아야 하는 것이 궁중 법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정왕후가 특별히 궁에 머물도록 허락하여 명종 4년(1549)에 궐 밖으로 행차한 사이 사가에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하나, 『선원보감』에는 중종이 죽은 후 인수사(仁壽寺)로 입산해 비구니가 된 뒤 속세와 인연을 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선조가 명종을 이어 등극한지 10년만에 3품 숙용에서 정1품 빈으로 추봉되어 ‘창빈’에 봉해졌으니, 이후 조선조 360여 년간 창빈 안씨의 혈손으로 14명의 왕위가 이어져 내려갔다.

죽음을 맞이한 창빈 안씨는 당초 경기도 양주 지역의 장흥리에 묻혔다. 그런데 풍수상으로 흉지라는 소문이 떠돌자 덕흥군이 이듬해에 바로 한강 건너 지금의 자리인 과천(果川) 지역의 동작리(銅雀里) 언덕에 천장을 하니, 세간에서는 ‘동작릉(銅雀陵)’이라 불렀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4호인 이 묘역에 올라서면 바로 아래에 한강이 흐르고 멀리 남산과 북악을 넘어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명당임을 한 눈에 알 수 있는데, 이곳은 한북정맥의 관악산 내룡맥이 한강수를 만나면서 마치 공작새가 알을 품듯 감싸 안은 공작포란형의 군왕지지였다. 그러하니 왕실이나 조정 권신들에게 발각되면 역모로 몰려 죽음을 면치 못할 판국이었는데, 이 묘를 쓴 뒤 1년 만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이 태어났고 그가 바로 선조대왕이 되었으니, 천추만대에 발복할 자리가 드디어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풍수전문가 최창조 교수는 그의 책 『풍수잡설』에서 최고의 명당으로 진단하면서, “지금 이곳은 분위기가 음울하고 냉랭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인데, 이는 이 땅의 성격이 그러해서가 아니라 주위의 조경이 잘못된 때문”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조선 후기 왕통의 시원지 동작릉의 어제와 오늘]

선조가 즉위한 지 10년만인 1577년에 안씨는 ‘창빈(昌嬪)’으로 추봉되면서 특명으로 덕흥대원군의 사당에 향사되었다. 창빈의 행적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자료는 많지 않으나 선조 이후부터 창빈 안씨에 대한 조정의 논의는 자주 거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의 관련기사에 따르면 효종조에 이미 창빈 안씨가 불천위였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숙종 2년(1676)에는 종신(宗臣) 한평부수 이연(李演)이 창빈의 묘에 수호군(守護軍)을 두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선왕조실록』 숙종 7년(1681년) 3월 17일 기사에 신도비 건립 경위를 밝히고 있는데, “낭원군(朗原君) 이간(李偘)이 상소하기를, “창빈 안씨께서 덕흥대원군을 탄생하셨는데, 묘도(墓道)에 비조차 없습니다. 청컨대 미처 거행하지 못했던 의식을 빨리 거행하소서.”하였는데, 임금이 사체(事體)가 중대하다 하여, 대신들에게 의논하도록 명하였다. 여러 대신들이 모두 묘도(墓道)에 오히려 드러나게 새길 것을 빠뜨린 것은 진실로 흠사(欠事)이므로, 특별히 명령하여 마땅히 천수(阡隧)에 비석을 세워야 한다”고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묘소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고, 묘 앞에는 묘갈, 석등, 석인상 2기가 세워져 있으며, 숙종 때 건립된 신도비가 있는데, 후궁 원묘에 보기 드물게 신도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는 창빈 안씨 혈손들이 조선 후기 내내 대통을 이어갔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아울러 묘의 배치와 규모를 통해 조선왕실 후궁의 묘 제도를 추정할 수 있기도 하다. 비신은 화강암이며, 신도비의 총 높이는 312㎝, 비신의 높이는 204㎝, 폭은 63.5㎝, 받침돌의 높이는 38㎝, 지붕돌의 높이는 70㎝로 당시 몇 안 되는 정사각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방형대석은 지반석과 좌대석이 한 돌로 되어 있어 장중하다. 옥개형 지붕돌은 유난히 크며, 꼭대기의 연단을 좌측으로 돌아가면서 새긴 약 18~19㎝크기의 전액(篆額)은 동평군(東平君)·오위도총부도총관 이항(李杭)이 ‘昌嬪安氏神道碑銘(창빈안씨신도비명)’이라 썼다. 비문은 예조판서 신정(申晸)이 짓고, 행판돈녕부사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건립 연대는 비문 끝의 ‘崇禎紀元後五十六年(숭정기원후 56년)’이란 기록으로 보아 1683년(숙종 9)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도비 건립 논의가 시작된 지 2년 만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7년 8월 8일에 교정청에서 『어첩(御牒)』과 『선원록(璿源錄)』 51권의 교정을 마무리하면서 『지장통기(誌狀通記)』 7권과 『왕비세보(王妃世譜)』 3권을 만들때에 창빈·덕흥대원군·인빈(仁嬪)의 지장(誌狀) 지문(誌文)과 행장(行狀)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추가로 실었음을 밝히고 있다. 경종 때의 사친을 추모했던 일이나 고종 때 창빈의 묘소에 치제케 하는 등과 같은 조치는 선조 이후 창빈 안씨에 대한 조정의 관심을 보여 주었던 사례이기도 하다.

이렇듯 조선 후기 왕통의 시원지였던 곳이 바로 창빈 안씨 묘역이었기에 ‘동작릉’으로까지 불렸으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부터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즉, 수많은 순국자들이 배출되자 1953년 9월 29일에 이승만 대통령 재가에 의해 국군묘지 부지로 확정되었던 것이다. 조국 광복과 더불어 국토방위의 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한 장병들을 서울 장충사에 안치해 오다가 그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새로운 부지를 물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서울 근교는 물론이고 지방의 몇 군데가 검토 대상이 되었으나, 국립묘지의 최종 후보지가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현 위치로 결정되었다.

이에 1955년 7월 ‘국군묘지관리소’가 발족되고, 이듬해 군묘지령[대통령령]이 제정되어 군 묘지 운영과 관리를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군인은 물론 군무원이나 순국선열과 국가유공자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안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6·25전쟁으로 발생한 많은 전사 장병 처리를 위해 군인 위주의 안장이 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고, 1965년에 가서 국립묘지령을 새로 반포하여 애국지사와 경찰관 및 향토예비군까지 대상이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2005년에 의원입법인 「국립묘지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현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의 국립묘지 명칭은 ‘국립서울현충원’으로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원래 창빈 안씨의 묘역이었기에 그 주인공의 묘소 또한 그대로 보존되어 함께 관리되고 있는 셈이다.

[수정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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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11 내용 변경 [창빈 안씨의 삶과 죽음] 이 묘를 쓴 뒤 4년 만에 덕흥군의 → 이 묘를 쓴 뒤 1년 만에 덕흥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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