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430
한자 鷺梁津圖
영어공식명칭 Painting of Noryangjin Ferry Landi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지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세기 - 「노량진도」 제작
현 소장처 고려대학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성북구 안암로 145[안암동5가 1-2] 고려대학교 안암캠퍼스
성격 회화
작가 장시흥(張始興)
서체/기법 실경산수화
관리자 고려대학교 박물관

[정의]

조선 후기 화원화가 장시흥이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었던 노량나루 일대를 그린 실경산수화.

[개설]

「노량진도(鷺梁津圖)」는 조선 후기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진경산수화를 계승한 왕실의 화원(畵員) 화가인 장시흥(張始興, 時興)[1714~?]이 노량나루와 그 주변 전경을 현장감 있게 그려낸 실경산수화이다. 조선시대 노량나루는 경기도 시흥(始興)을 지나 수원으로 오가는 길목이었다. 또한 노량나루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의 삼남지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뿐만 아니라 노량의 모래사장에서는 조선 후기 한양을 방어하는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의 삼군영이 습진(習陣)을 이뤄 군사훈련과 열무(閱武) 의식을 치뤘기 때문에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 외에도 조선 시대 충신의 상징인 사육신(死六臣)의 묘소와 사당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형태 및 구성]

「노량진도」는 세로 21.5㎝, 가로 17.0㎝의 크기이며 종이에 먹으로 윤곽선을 그리고 엷은 채색을 더하였다. 화면 우측상단에 ‘노량진(露梁津) 방호자(方壺子)’라는 묵서(墨書)와 함께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장시흥의 호가 방호자이므로 장시흥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장시흥이 그린 또 다른 한강의 나루 그림인 「동작촌도」와 함께 하나의 액자에 표구되어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화면 크기와 재질, 기법 등이 거의 유사하다.

[특징]

「노량진도」는 장시흥이 노량나루한강 백사장 건너편에서 바라보고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노량나루 너머 산기슭에는 사육신의 사당이 자리하며 멀리 관악산의 봉우리가 보이도록 하였다. 노량나루 앞에는 여러 척의 배가 정박해 있고 한 척의 나룻배가 많은 사람들을 태워 나르고 있다. 그럼에도 모래사장에는 여전히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분주한 나루터의 정경을 잘 보여준다. 주변의 산수(山水)는 장시흥 특유의 자유분방하게 흐트러진 피마준(披麻皴)과 짧은 붓질로 찍어낸 부벽준(斧壁皴)으로 묘사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문인들은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던 수도 한양에서 산수를 즐기며 시를 짓고 감상하는 문예 활동을 펼쳤다. 특히 진경산수화가 유행하는 가운데 이들의 활동 공간이 되었던 한양 명승명소의 실경이 산수화로 제작되었다. 장시흥의 「노량진도」는 겸재 정선에서 시작된 한양을 그린 실경산수화의 확산 속에서 비교적 정선의 화풍을 충실하게 계승하여 노량나루의 특징을 잘 포착해 그려낸 산수화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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