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필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37
한자 興宣大院君筆帖
영어공식명칭 Heungseon Daewongun's specimens of handwriting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지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866~1898년 사이 - 『흥선대원군필첩』 저술
소장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로 369[상도동 511] 숭실대학교지도보기
성격 필첩
저자 이하응
규격 세로 32.0㎝|가로 21.9㎝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필첩.

[개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무비(武備) 강화 및 재정 운영 등에 대해 의견을 밝힌 글을 엮은 필첩(筆帖)이다.

[저자]

『흥선대원군필첩(興宣大院君筆帖)』의 저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이하응은 제26대 왕 고종(高宗)[1852~1919]의 아버지로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1863년 고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대원군에 봉작(封爵)되어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실시할 때까지 국정운영을 주도하였다. 세도정치를 주도했던 외척세력을 배제하고 왕권 강화와 체제 개혁 등으로 조선 말기 내부 모순을 완화시키고 외세 침략을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전통 사회의 해체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서화에도 능해 묵란도(墨蘭圖)로 잘 알려져 있다.

[편찬/간행 경위]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는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형태/서지]

『흥선대원군필첩』의 크기는 세로 32.0㎝, 가로 21.9㎝이며, 표제는 ‘흥선대원군필첩(興宣大院君筆帖)’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글이 21면으로 장책(粧冊)되어 있고, 첫 번째면 중앙 상단에 ‘독립기념기독교박물관장(獨立紀念基督敎博物館章)’이라고 새긴 장서인(藏書印)이 날인되어 있다. 글을 쓴 날짜와 시간 등은 적혀 있지만 수신인은 밝히지 않았고 기록의 일부가 유실되어 있다.

[구성/내용]

『흥선대원군필첩』흥선대원군 이하응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군비 강화와 재정 운영 등에 관한 의견을 밝힌 글들로 생전에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1866년 병인년 환곡(還穀)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호남과 영남 지방에 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을 내려 보낸 일, 황해도의 군사 요충지인 수양산성과 장수산성을 보수한 일, 국왕이 친히 사졸(士卒)을 위무한 일, 병인양요가 발발하자 각 군영을 통할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군령기관인 순무영(巡撫營)을 혁파한 일, 강화도를 거쳐 한강으로 연결되는 황해도 오차진(吾叉鎭)과 강령도(康翎島)에서 밀수범 및 국경을 침범한 이를 단속한 일에 관한 내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흥선대원군필첩』은 표류하는 외국인과 접촉하거나 이양선이 정박할 수 있는 장소에 대한 대처방안이 기록된 중요한 기록물이다. 특히, 병인양요 직후 중요한 보장처로 주목받은 강화도의 관아 건물과 무기, 전함들을 수리한 상황, 화포과(火砲科)를 창설하고 조총(鳥銃)을 다룰 수 있는 인재를 선발하여 포군(砲軍)을 증설하는 등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병인양요를 계기로 당시 변화한 조선의 상황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 중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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