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풍류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1170
한자 鷺梁津風流房
이칭/별칭 노량진풍류회
분야 생활·민속/민속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지도보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유선영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던 조선시대 무당 단체.

[개설]

무업(巫業)에 종사하고 있는 무당들이 상부상조하고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무부계(巫夫契)의 일종으로 이들 모임을 풍류방(風流房)이라 하였다. 조선의 무격은 조직화 되어 각 지역마다 무조직이 존재하였으며, 지역에 따라 명칭을 달리하였다. 전라남도 장흥 신청(神廳), 나주 신청, 경기 재인청(才人廳), 노량진 풍류방(風流房)이 대표적이다. 조선 시대 무격성외축출정책(巫覡城外逐出政策)에 의해 도성에서 쫓겨난 무당들이 노량진에 집단으로 거주하게 되면서 노량진을 중심으로 형성된 무부계를 ‘노량진 풍류방’이라 하였다. 무(巫)와 무악인(巫樂人)의 특약 관계를 나타낸 만신열록기(萬神列錄記)를 통해 노량진 풍류방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다. 노량진 풍류방에서는 회장을 영위(領位)라 하였으며, 관수(管手), 계대(啓對)[또는 기대], 자비(自備)의 삼차비(三差備), 그리고 서사(書寫)까지 네 개의 소임을 두었다. 회원은 해금과 피리 연주자인 남자무당들과 장구와 제금을 연주하는 여자무당이다. 남자무당을 관수라 하고, 장구잽이를 계대[기대]라 하였으며, 제금 따위를 연주하는 여자무당을 자비라 하였다. 회장인 영위는 남성이지만 소임은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들이 모이는 장소를 풍류방이라 칭하였는데 재인청(才人廳), 공인방(工人房)과 비슷하다.

[설립 목적]

1853년(철종 4)에 작성한 완문(完文)에 따르면 수백 호이던 무당집이 40여 호 밖에 되지 않아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한 무당들이 스스로 세금을 내고 폐습을 없애기 위한 회칙을 마련하여 생계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이 마련한 법의 목적은 무호를 모이게 하는 것, 마을의 폐단을 줄이는 것, 관납의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전악, 계대, 자비는 단골을 기록하고 단골을 매매할 때에는 매인처(賣人處)에 표를 붙이고 사는 사람의 성명으로 바꾸어 쓰도록 규칙을 삼았다. 또한 소임은 1년씩 번갈아 맡으며 교대시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문서로 전장(傳掌)하되 회원들의 허락을 받는다. 규칙 중 많은 부분이 돈을 받고 빌려주는 것과 관련이 있다. 받은 돈을 보관하는 법, 체납 시 이자, 빚을 주는 일과 문서를 담당하는 자, 돈을 빌려줄 때 보증을 세우는 것, 규약을 위반한 사람의 벌금 등이 기록되어 있다.

[변천]

조선 시대 성밖으로 축출된 무격들이 용산 부근 노들에서 무당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나 1925년 대홍수로 인해 노들 지역 무당촌이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곳에 살던 무당들이 동작구 본동의 산기슭에 모여 살게 되었다. 이후 성 밖으로 쫓겨난 무당들은 대규모 집단을 이루며 노량진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무당과 무악인의 경제적 생활을 위해 조직한 이러한 집단은 노량진 이외에도 다양하게 분포하였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는 무당과 무악인을 위해 만들었던 많은 조직들이 거의 쇠퇴하게 되고, 전남 지역에 소수만 남게 되었다. 노량진의 무격 집단 역시 갑오개혁을 기점으로 크게 쇠퇴하였으나 여전히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그 세력이 커 1930년대까지도 무당촌을 유지할 정도로 노량진 무당촌의 세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격]

서울 지역에는 크게 세 유파의 무당들이 있었다. 동쪽의 ‘각심절본’, 남쪽의 ‘노들본’, 서쪽의 ‘구파발본’이라 알려진 유파인데 노량진 풍류방에 모인 무당들은 남쪽의 노들본 유파에 속한다. 이 각 유파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지역에 모여 촌을 이루었으며 각 유파마다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 각심절본은 진적굿과 재수굿, 구파팔은 진오귀굿이 유명했고, 동작구의 노량진풍류방이 속했던 노들본은 서낭굿으로 명성이 높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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