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11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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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主敎 |
영어의미역 | Catholic Church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하창환 |
[정의]
경상북도 고령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개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 말엽 북경을 왕래하던 조선 사신들이 그곳의 선교사들과 접촉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천주교의 전래는 선교사들의 직접적인 선교가 아니라, 이른바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라 불리는 그들의 저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함께 선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비로소 천주교의 신앙 공동체가 구성되게 되었다.
하지만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사학(邪學) 또는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조정에 이를 근절할 것을 촉구했고, 조정에서는 천주교를 국법으로 엄금하는 한편 위반하는 천도교도들을 사형으로 다스렸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 심해져 1801년의 신유박해, 1839년의 기해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 등으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은 조정의 박해를 피해 벽촌으로 숨어 지내는 등 어려운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천주교가 조정의 박해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 것은 1886년에 체결된 한불조약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가 허용되면서부터였다. 그리하여 1892년 서울 중림동에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인 약현성당이 지어졌으며, 선교사의 체류가 허용된 개항지를 시작으로 대도시나 박해 시대에 피신한 신자들의 교우촌을 중심으로 본당(本堂) 조직이 빠르게 결성되었다.
[도입기]
고령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인근 대도시인 대구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대구는 1911년 처음으로 조선교구에서 분할하여 독립된 교구로 설립되었다. 대구가 이처럼 독립된 교구로 신설될 수 있었던 것은 1899년 로베르 신부가 계산동에 한국식 십자형 성당인 계산성당을 건립하고, 이를 근거로 대구를 비롯해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서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계산성당에는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를 피해 대구에 은거하며 본관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바꾼 한양김씨(漢陽金氏)가 다니고 있었다. 고령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교의 복음이 전해진 것은 바로 김씨의 후손인 김만득[이냐시오]이 1931년 고령군 고아리로 이주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936년에는 김옥출[도마], 정말순[요안나] 부부가 칠곡군에서 대가야읍 쾌빈리로 이주해 오는 등 점차 신도가 늘어나면서 1940년 김만득의 집을 고령공소로 정하게 되었다. 이는 사실 1940년 장병화[요셉] 마산교구 주교의 아버지 장안드레아가 고령에 잠시 거주하게 되면서 그의 신앙생활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한 것이어서, 장안드레아가 고령을 떠난 이후 1950년까지 공소 활동이 위축되었다.
[확장기]
고령 지역 천주교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1955년 화원본당의 박재수[요한] 신부가 고령 지역으로 부임하면서부터였다. 박재수 신부는 1958년 대가야읍 쾌빈리에 공소를 마련했으며, 이를 계기로 고령 지역에는 은양원공소와 박곡공소를 비롯한 여러 공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박재수 신부는 그 해 9월부터 고령본당을 건립할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하여 1964년 12월 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26번째 본당인 고령성당을 건립하였다.
[현황]
2010년 현재 고령 지역에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소속의 고령성당과 다산성당이 있다. 그리고 고령본당의 관할 공소로는 덕곡공소, 박곡공소, 백산공소, 운수공소 등 4개의 공소가 있다. 고령성당은 50년에 가까운 역사로 고령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에게 변함없는 신앙의 터전이 되고 있다. 다산면의 다산성당은 인접한 대구광역시에서 인구가 유입되면서 이 지역의 천주교 신도를 위한 성당 건립의 필요성에 의해 2002년 새롭게 건립되었다. 그러나 13개에 이르던 공소가 4개로 축소된 것은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에 따른 여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