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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 백자요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01567
한자 白里白磁窯址
영어의미역 White Porcelain Kiln Site at Baek-ri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백리 산 4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동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도요지
원건물 건립시기/일시 조선 후기
소재지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백리 산 45 지도보기

[정의]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백리에 있는 조선 후기 백자요지.

[위치]

대가야읍에서 덕곡면 노리 방향으로 난 군도 2호선을 따라 가다보면 덕곡면사무소가 있는 예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좀 더 가야산 방향으로 올라가면 오른편에 백리로 진입하는 도로가 나온다. 이 도로는 덕곡면 가륜리에서 백리를 거쳐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로 연결된다. 백리 백자요지는 백리 새터마을을 지나 밤티마을에 조금 못 미친 도로 오른쪽의 산사면에 자리한다. 즉 새터마을에서 밤티마을로 난 도로를 따라 300m 정도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에 민가가 한 채 보이고, 이 민가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다시 200m 정도 올라간 곳에 위치한다.

[현황]

백리 백자요지는 크게 보면 가야산의 남동쪽에 형성된 산록에 입지한다. 이곳은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부 끝자락의 해발 150m 정도 되는 지점이다. 가마터 주변은 계단식으로 평탄하게 정지된 상태로, 30~40년 전까지 밭으로 경작을 해온 지역이다. 현재는 주변에 지름이 30~40㎝ 정도 되는 상수리나무를 비롯해 잡목이 우거져 있다. 또한 과거에 밭으로 경작했던 곳은 칡이 우거져 있어 조업 당시의 지형은 자세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

현재 육안으로 10m 정도 간격으로 2기~3기의 가마가 확인되고, 주변에 더 많은 가마와 관련된 시설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어느 정도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1호 가마는 길이 13.5m, 폭이 5m, 높이 50㎝ 정도이다. 가마는 등고선과 수직되게 능선 방향의 경사면을 따라 길게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가마 주변으로는 각종 백자편을 비롯해, 도침(陶枕)과 가마 잔해들이 흩어져 있다.

도침은 백토를 정선하고 난 후 남은 것을 활용해서 만든 것으로 보이며, 도침 바닥의 경사진 각도로 보아 등요(登窯) 바닥의 경사도를 추정해 볼 수 있다. 가마터가 위치한 백리 인근에는 백자의 원료가 되는 고령토 광산이 위치해 있어, 근래에 이르기까지 백토가 다량으로 산출되었던 곳이다. 즉 가마터에서 300m 정도 올라간 북쪽의 야산 정상부와 남쪽 맞은편으로 700m 정도 떨어진 배울마을 산록에는 지금은 폐광이 된 고령토 광산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인근의 노리에는 지금도 운영되고 있는 고령토 광산이 위치해 있다. 백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가마터가 위치한 곳을 ‘점개울’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상재의 증언에 따르면, 이 가마터는 덕곡면 성동리에 사는 백씨가 아들과 함께 가마를 지어 백자를 만들었다고 하는 말을 전해 들었다고 한다. 또 백리 백자요지 외에 남쪽 맞은편의 밤티마을 뒤편에도 2곳 정도의 가마터가 더 있다고 하나, 직접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이상재가 증언한 백씨는 현재 운수면 신간리에서 고령요(高靈窯)를 운영하고 있는 백영규(白永奎)로, 조부는 백용준이고, 부친은 백암이라고 한다. 백용준은 덕곡면 성동리 101번지에 적을 두고 백리에 가마를 설치하여 백자를 생산하였다. 백암이는 김천시 구성면에서 백자 등 자기를 생산했다고 한다. 백영규는 현재 부친의 가업을 전승하여 전통 도자를 생산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백리 백자요지에서 수집되는 백자는 대부분 별다른 장식이 없는 순백자이며, 시기적으로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 여겨진다. 기종으로는 생활 용기인 발이 전체의 86%로 주를 이루며, 접시와 종지가 일부 포함되어 있다. 백자는 크게 유약의 색깔을 중심으로 유백색과 청록색으로 구분된다. 전체적인 수량에서는 유백색이 70% 이상을 차지한다.

이곳의 백자는 대가야읍쾌빈리 공영 주차장 부지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조선 후기에서 일제강점기에 이르는 관아 건물지에서 출토된 백자들과 유사한 공통성을 지닌다. 특히 발과는 기형이나 특징 등이 매우 비슷하여 서로 공통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점은 백리 백자요지에서 생산된 백자가 조선 후기에 고령 관아에 공급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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