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190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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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Strolling around Jangjamot with Story |
분야 | 구비 전승·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기도 구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강현모 |
[정의]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장자못 전설을 풀어 보는 이야기.
[개설]
구리시 수택동에는 장자 호수 공원이 있다. 장자 호수 공원은 한강 유역에 위치한 자연 하천형 연못인데, 왕숙천과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배후 습지 형태가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장자못이 생긴 시기는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대에 있었던 연못으로는 늪의 형태가 가마처럼 둥그렇게 생겼다고 붙여진 가마늪, 가마늪 남서쪽에 있는 형태가 좁고 긴 꼽장늪, 토막 나루 북서쪽 아치올 못 미친 곳에 있었던 메물늪, 수늪의 서쪽에 있어 수택동 사람들이 빨래를 하던 빨래늪, 장자늪 남쪽 밑에 있던 작은 늪인 실늪, 꼽장늪과 장자늪 사이에 있던 작은 늪인 종지늪, 꼽장늪 남서쪽에 있고 장자못 전설이 전해지고 있는 장자늪이 있다. 그 밖에도 바위뿌리늪, 수늪 등이 있었으나 일부는 매몰되었고. 일부는 남아 있었다.
[장자못이 장자 호수 공원으로 변모]
장자못[장자 호수 공원]의 늪들은 농경지의 물을 대 주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작은 열매와 물고기 등 먹을거리를 제공하여 왔다. 그런데 도시화되면서 차차로 매립되어 점차 작아지다가 토평 지구 개발과 함께 개수 및 보수하여 생태 복원이 가장 잘된 호수 공원으로 변모하였다. 즉, 장자못을 온전하게 보전하면서 아차산과 한강의 자연 경관상으로 조화를 이루며 서울 인근의 자연 연못으로 이루어진 공원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장자 호수 공원의 규모를 보면, 면적이 10만 7385㎡이고, 평균 수심이 2.2m이며, 물이 덮인 면적이 6만 9560㎡로 평균 수량이 15만 7205㎥이다. 호수의 길이는 1.8㎞이고, 주변에는 3.8㎞의 산책로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정서적인 휴식처를 제공하면서, 정신적·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장소로 거듭나고 있다. 장자 호수 공원은 또한 구리 시민들의 공동체 의식을 꽃피우는 구심체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장자 호수 공원은 구리시의 문화적 상징물로, 인공 연못과는 다른 역사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장자 호수 공원에는 옛날부터 전해 오는 전설이 있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장자못 전설의 전승 양상]
지금까지 구리시에 전승하고 있는 장자못 전설은 20여 편에 이른다. 구리시 장자못 전설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은 최래옥 교수이다. 최래옥 교수는 1968년 구리면 아차리에서 김석환[72세, 남]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한국 구비 전설의 연구』에 소개하였다. 이후 '구리시'라는 지역 의식을 가지고 조사를 한 사람은 조희웅이다. 조희웅은 1980년 8월 20일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에서 이강범으로부터 조사하여 1981년 발간한 『한국 구비 문학 대계』(경기도 의정부시·남양주군 편)에 두 편을 수록하였다. 그중 한 편은 1996년에 간행한 『구리의 역사와 문화』에 변형하여 재수록되었다. 또 전(前) 중앙 대학교 교수이자 민속학자인 이수자는 1995년 3월 4일 토평동 제2 경로당[여자 경로당]과 문기열 제보자 자택에서 각 한 편씩을 조사하여 『구리시지』에 수록하였으며, 1995년 4월 21일 구리시 동구동 경로당에서 이성근[1917년생, 남]으로부터 채록한 것을 1998년 발간한 『설화 화자 연구』에 수록하였다. 구리 문화원에서 2002년에 간행한 『구리시의 민속 문화』에도 두 편이 있는데, 한 편은 『설화 화자 연구』 자료를 재수록하였고, 한 편은 2000년 10월 16일 구리시 동창 마을에서 김무희와 이성근에게서 채록하였다. 권태효는 2004년 4월 10일에 구리 문화원 사무실에서 송영기가 구술한 것을 『경기 민속지』(7-구비 전승)에 수록하였다. 강진옥 외 3인이 2014년에 조사한 자료는 16편인데, 『증보 한국 구비 문학 대계』(경기도 구리시 편)로 간행될 예정이다.
구리시에 전하는 장자못 전설의 내용을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자못 근처에는 옛날에 천하의 소문난 구두쇠 영감이 살고 있었다. ② 하루는 옥황상제[중 또는 도사]가 시주를 나왔다. ③ 두엄을 치우고 있던 구두쇠 영감은 시주는커녕 바리떼에 소똥을 퍼 주었다. ④ 이를 지켜본 며느리가 몰래 쌀을 퍼 담아 주면서 시아버지의 잘못을 사죄하였다. ⑤ 옥황상제[중 또는 도사]는 며느리에게 곧바로 따라나서되 되돌아 보지 말라고 하였다. ⑥ 옥황상제를 따라 나선 며느리는 갑자기 비가 내리자 장독대를 덮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나서 뒤돌아보았다. ⑦ 그때 자기가 살던 집이 물에 가라앉은 것을 본 며느리는 목이 달아나면서 그 자리에 굳어서 돌[석상]이 되었다. ⑧ 마을 사람들은 그 며느리 석상을 마을 서낭신으로 지극하게 모셔 왔다.
[구리시의 장자못 전설의 등장 인물]
장자못 전설의 등장인물을 보면, 장자못 전설에서 인색한 구두쇠 장자를 징치한다는 점은 다른 지역의 설화와 비슷하다. 그런데 이곳의 내방자에 대한 변이가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뒤에 며느리가 돌미륵이 되는 과정에서 신이한 능력자가 필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곳의 내방자로는 도사나 중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옥황상제나 하늘에서 내려온 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는 내방자의 능력이 뛰어남을 드러내는 동시에 도덕적 내면 의식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기하기 위하여 구술자의 의식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내방자가 시주를 부탁하였을 때 불교에서 느낌을 주는 장자의 행위는 두엄 혹은 쇠똥을 중에게 주는 박덕한 행위를 통하여 악인의 표상이 되었다. 즉, 동냥 또는 시주를 줄 때 불교를 배척하는 행위를 보이는데, "멀쩡한 놈이 동냥이라니 있어도 안 준다. 중은 밥도둑이며 밥벌레다."라며 쇠똥이나 인분을 퍼 준다. 일부 자료에서는 중을 가해하거나 때리기까지 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에 비하여 며느리는 쌀을 준다. 며느리가 주는 쌀은 쇠똥의 상대적인 의미로 선을 의미한다. 이것은 쌀을 준 며느리가 쌀과 같이 귀하고 선한 존재임을 의미한다.
[장자못과 관련 전설]
구리시 장자못 관련 설화를 살펴보자. 「며느리는 왜 천벌을 받는가」의 내용은 며느리는 중에게 쌀을 주고 중의 말에 따라 집을 나와 따라나선다. 이때 중은 며느리에게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주었다. 그런데 따라나섰던 며느리는 뇌성벽력과 함께 비가 내리자 장독을 덮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돌미륵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목이 떨어진 돌미륵이 되었다. 여기에서 악한 존재인 장자는 천벌을 받아 살던 집이 물에 잠겼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런데 내방자인 중에게 귀한 쌀을 준 선한 며느리가 뒤를 돌아보았다고 하여 천벌을 받아 목이 떨어지는 돌미륵이 되었다고 하는 내용은 수긍하기 어렵다. 그것도 부녀자의 당연한 역할인 장독을 덮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뒤돌아본 것에 대한 벌이라고 하였을 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에 대해 한 자료에서는 며느리가 벌을 받은 것을 두고 "더러운 놈의 마음을 못 잊어서 돌아보느냐?" 하며 천벌로 목을 베었다고도 한다.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완전한 단절이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구리시 장자못 전설에 등장하는 며느리들은 겨우 집 안의 장독대에 연연하고 있었기 때문에 옥황상제나 하늘에서 내려온 자가 며느리를 징벌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제보자들은 의식하고 있다고 하겠다.
「며느리와 서낭신」의 내용도 비슷하다. 우미내의 비냥 고개에 있는 서낭당에서는 목이 떨어져 돌미륵이 된 며느리를 서낭신으로 모셨는데,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뒤돌아봐서 목이 떨어져 돌미륵이 되었다는 내용은 우연히 신상의 목이 떨어지면서 설화의 내용이 변이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구연되는 자료에서 목이 떨어져 죽은 며느리의 돌미륵은 천벌에 의한 죽음으로 인식하였을 것이다. 며느리의 비극적인 죽음, 그것도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죽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 그것도 한이 크고 비극적일 때 신이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장자못 전설에 등장하여 목이 떨어져 죽은 며느리는 신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돌미륵은 원래 우마차도 다니기 힘든 좁은 길가에 위치하였다. 한국 전쟁 때 미군들이나 뒤에 한국 사람들이 이곳의 길을 넓히다가 돌미륵을 한강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그 후 우미내에 사는 사람들이 돌미륵을 재조성하여 오늘날까지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우미내 비냥 고개 서낭당 신앙은 장자못 전설과 밀접하게 관련된 점에서 귀중한 사례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