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권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68
한자 光州券番
영어공식명칭 Gwangju Gwonbeon
이칭/별칭 광주예기조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손영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7년연표보기 - 광주예기조합 설립
해체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광주권번 해체
개칭 시기/일시 1928년연표보기 - 광주예기조합에서 광주권번으로 개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1년 - 광주국악원 설립
최초 설립지 광주예기조합 - 광주광역시 동구 남동 21 지도보기
성격 문화예술 단체

[정의]

1917년 광주광역시에서 설립된 기생 조합.

[개설]

일제강점기에 광주권번광주예기조합으로 시작된 기생들의 조합이다. 해방 이후 1951년에는 광주권번의 후신으로 광주국악원이 창립되었다.

[설립 목적]

대한제국기까지 관기를 관리하던 교방(敎坊)은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 궁중 관기 해산의 흐름 속에서 폐지되었다. 이후 일제는 기생들의 관리를 경시청으로 옮겨 기생과 창기를 구별 없이 단일화하였다. 「기생단속령」 발포 이후 기생들은 조합에 가입해야만 활동이 가능했고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광주에는 조합이 없어서 타지역에서 큰 비용을 지불하고 기생을 불러와 행사를 개최하게 되면서 점차 조합의 필요성이 커져 광주권번이 설립되었다.

[변천]

광주권번의 전신은 1917년 기생 50명으로 출발한 ‘광주예기조합’이다. 이후 광산권번과 광주권번으로 분화되었다가 일제에 의해 1928년 광주권번으로 통합되어 정식화된다. 1930년대부터 경제적 불황으로 인해 기생들의 생계도 위협을 받았다. 광주권번은 1932년에 주식회사로 운영방식을 전환하는 등 변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권번의 불황이 계속되자 기생들은 주식회사를 해체하고 자영의 형태로 운영을 시도하였지만 경영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1938년 폐업하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광주권번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될 때 의연금을 쾌척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기근구제회 집행위원 서정희가 광주 방문을 하자 이를 계기로 기금마련 공연을 하였다. 고아 구제를 위한 기부금을 포함하여 홍수, 가뭄 등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에도 각종 공연을 열어 성금을 모으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광주권번은 나라의 어려움이 있을 때 적극 동참하는가 하면 투쟁을 통해 자치경영권을 획득하는 능동적 단체이자 자발적 주체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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