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77
한자 崔亨漢
영어공식명칭 Choi Hyeonghan
이칭/별칭 탁경(卓卿),영사정(永思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480년 - 최형한 진사 입격
활동 시기/일시 1483년 - 최형한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84년 - 최형한 전교서정자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498년 - 최형한 사간원헌납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00년 - 최형한 사헌부장령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03년 - 최형한 영암군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04년 - 최형한 사헌부지평에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04년연표보기 - 최형한 사망
사당|배향지 지산재(芝山齋) - 광주광역시 남구 지산재길 51[양과동 715-1]지도보기
성격 문관
성별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사간원헌납|사헌부장령|영암군수

[정의]

조선 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사간원헌납, 사헌부장령, 영암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최형한(崔亨漢)[?~1504]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할아버지는 옥과현감을 지낸 최중제(崔仲齊),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최영원(崔永源), 어머니는 박계양(朴繼陽)의 딸이다. 부인은 김효본(金孝本)의 딸 영광김씨(靈光金氏)이다. 최형한은 김씨와의 사이에 3남 3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최형한은 1480(성종 11)년에 진사가 되었고, 3년 뒤인 1483년(성종 14) 식년시 을과 1위[전체 4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이듬해 전교서정자(典校署正字)에 임명되었으나 큰 병을 얻어 사직을 요청하였다. 최형한이 다시 정계에 등장한 것은 5년 뒤인 1498년(연산군 4)으로, 이때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다. 최형한은 1500년(연산군 6)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거쳐 1503년(연산군 9)에는 영암군수(靈岩郡守)에 발탁되어 외직 활동도 경험하였다. 1년 뒤인 1504년(연산군 10)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어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당시 연산군에게 거리낌없이 직언하다 왕의 노여움을 사서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왕명만을 기다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는 “효우와 문장으로 세상 사람의 존중을 받았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이 서(序)와 기(記)를 지어 추천하고 존중하기를 심히 성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중기에 활동하였던 도암(陶庵) 이재(李縡)[1680~1746]가 최형한의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상훈과 추모]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에 있는 지산재(芝山齋)최형한을 비롯하여 신라 시대의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최운한(崔雲漢), 정오도(鄭吾道) 등 4위를 모셨던 사당이다. 1737년(영조 13) 지금의 자리에 영당(影堂)을 세워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다가, 1846년(헌종 12)에 지산재를 세우면서 최형한과 최운한, 정오도 3인이 추가로 배향되었다. 그러나 1886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2년에 현재의 건물을 복원하였고, 여러 차례 중·보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22년에 복원된 뒤로 지산재최치원만을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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