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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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律成 |
영어공식명칭 | Jeong Yulseong |
이칭/별칭 | 정뤼청,정부은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정유하 |
[정의]
전라남도 광주 출신 음악가로 중국 근현대 3대 작곡가의 한 사람.
[개설]
정율성(鄭律成)[1914~1976]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정율성의 아버지 정해업(鄭海業)은 부은(富恩)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나,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율성(律成)이라고 바꾸었다.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선전과와 화북조선혁명청년학교 등에 소속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한 음악인이자 작곡가이다.
[활동 사항]
정율성은 1928년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933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셋째 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 난징[南京]으로 떠나 의열단에서 운영하고 있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상하이 예술전문학교 교수로 있는 레닌그라드음악원 출신의 성악가 크리노와(Krenowa)를 찾아가 1년 동안 성악과 이론을 공부하였다.
1935년 정치사상 교양과 항일 구국 문예 활동, 연극 등을 통한 대중 교화를 목표로 결성된 '오월문예사(五月文藝社)'의 창립 대회에서 자신이 작곡한 「오월의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가 '오월문예사'의 사가로 인정되었다. 1937년 중국 공산당[팔로군]의 근거지인 옌안[延安]으로 이주하여 노신예술학원(魯迅藝術學院) 음악학부에서 수학하였으며, 노신예술학원 문학부의 여학생 막야(莫耶)에게 가사를 부탁하여 「연안송(延安頌)」을 작곡했는데, 이 노래가 마오쩌둥[毛澤東]의 격찬을 받으면서 널리 배포되었다.
1939년 노신예술학원에서 성악 교원을 담당하였으며, 1949년 조선음악대학 작곡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53년 중국 중앙가무단에서 창작 활동을 하였으며, 1961년 북경인민예술극장 조선예술영화 「붉은 선동원」의 연극 각색에서 음악 창작을 하였다. 1976년 12월 베이징에서 고혈압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가곡으로 「연안송」, 「연수요」, 「아랑에게 부침」, 「생산요」, 「신산가」, 「육탄용사」, 「아름다운 청도」, 「철도노동자 노래, 「시냇물은 용같네」, 「장강 대교」 등이 있다. 합창곡으로 「청평악 육반산」, 「십육자령3수」, 「칠률 장정」, 「억진아 루산관」 등이 있으며, 대합창곡으로 『팔로군 대합창』[8곡으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한 곡인 「팔로군 행진곡」은 이후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곡명이 바뀜], 『두만강』, 『동해어부』, 『어부지가』, 『행복한 농장』, 『추수봉기』 등이 있다.
동요로 「평화의 비둘기」, 「우리들은 정말 행복해」, 「소년운동원의 노래」, 「유쾌한 소년」, 「푸른 조국」 등이 있다. 가극으로 『망부운』이 있으며, 가무극으로 『중일청년친선』 등 총 360여 곡의 작품을 창작하였다.
[묘소]
중국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혁명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41년 5.4청년절에 『팔로군 대합창』으로 음악 갑등상을 수여받았고, 1955년 『친선평화행진곡』으로 세계청년연환절에서 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