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45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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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掛鼓亭-光山李氏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염승연 |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 1989년 2월 - 「괘고정과 광산이씨」 광주광역시 광산구 만산마을에 거주한 이승만과 이동휴의 이야기를 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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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간행 시기/일시 | 1990년 - 「괘고정과 광산이씨」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 |
관련 지명 | 괘고정수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79-3 |
채록지 | 만산마을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
성격 | 설화|지명설화 |
주요 등장 인물 | 이선제|이발|이상엽 |
모티프 유형 | 지명유래|인물 |
[정의]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서 전해 내려오는 괘고정이라는 나무와 광산이씨에 관한 이야기.
[개설]
「괘고정과 광산이씨」는 마살메마을에 있는 괘고정[괘고정수]이라는 왕버드나무와 광신이씨(光山李氏)에 얽힌 지명전설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9년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거주하는 이승만과 이동휴의 이야기를 채록하였으며,1990년 광주직할시에서 간행한 『광주의 전설』에 수록하였다.
[내용]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마살메[만산동]마을에는 광산이씨가 살고 있으며, 광산이씨의 선조인 필문(畢門) 이선제(李先齊)[1389~1454]의 부조묘(不祖廟)가 있는 곳이다. 이선제는 마살메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이선제가 죽은 이후, 이곳에 묘를 쓰고 이선제의 다섯 형제가 시묘(侍墓)를 할 때 많은 선비들과 관리들이 출입했기 때문에 만호동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마을 어귀에 이르면 논 가운데 한쪽이 썩은 버드나무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괘고정(掛鼓亭)이라 불렀다. 괘고정은 이선제가 심은 나무로, 이선제가 죽기 전에 "이 나무는 내 자손들의 성쇠와 그 수를 같이 할 것이다"라는 예언을 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전해 내려왔다. 실제로 이 나무는 이선제의 5대손인 동암(東巖) 이발(李潑)[1544~1589] 형제 일가들이 정여립(鄭汝立)의 난에 몰려 장살을 당할 때 말라죽었다가 300여 년이 지나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이 나무가 심어진 이후 이선제의 아들과 손자들이 대대로 벼슬에 올랐는데, 이선제의 부조묘에 아들과 손자들이 모여 나무에 북을 걸고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아 축하연을 베풀곤 하였다. 이런 연유로 '북을 걸어 놓은 정자나무'란 의미에서 이 나무를 괘고정[괘고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선제의 5대손이 뿔뿔이 흩어진 뒤부터 괘고정은 말라 죽기 시작하여 나뭇가지가 모두 곰삭아 없어졌다. 그러나 원목만은 계속 형태를 유지하며 지탱하고 있었다.
숙종(肅宗)[재위 1674~1720] 때에 이르러 동암과 광산이씨들의 죄가 신원(伸冤)이 되고, 그 자손들 중 일부가 이곳으로 다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이곳에 살게 된 이상엽은 이 나무와 광산이씨들의 일화를 듣고, 아들 주신을 시켜 나무를 태워 흔적을 없애도록 하였다. 괘고정은 나무 가운데가 썩어서 보기가 흉했다. 주신은 집안 머슴들과 함께 괘고정 가운데에 마른 나무를 가득 채우고 3일간 불에 태웠다. 하지만 괘고정은 불에 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끼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주신이 아버지께 이러한 사실을 고하자, 이상엽은 썩은 나무 사이를 파고 양자 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주신은 정자나무로 알맞은 느티나무 묘목을 괘고정 사이에 심었다. 이 느티나무가 30년가량 자라자, 300년 전에 죽은 나무 한쪽에서 새 움이 트기 시작하였다. 현재 괘고정은 두 가지가 서북편으로 뻗어 높이 15m가량의 고목이 되었으며, 그 옆의 양자나무인 느티나무도 나란히 자라고 있다.
[모티프 분석]
「괘고정과 광산이씨」의 주요 모티프는 '인물에 의한 지명유래'이다. 괘고정은 이선제가 자손들의 성쇠와 나무의 수명이 같이 갈 것이라는 예언을 하며 심었던 버드나무다. 실제로 이선제의 자손들은 5대손까지 벼슬에 올랐고, 이를 이선제에게 알리기 위해 나무 앞에 북을 걸고 축하연을 베풀었다고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선제의 5대손인 동암 이발이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난에 연루되어 형제와 노모, 자식까지 죽임을 당하였고, 광산이씨들도 마을을 떠나 뿔뿔이 흩어졌다. 숙종 때 이발과 광산이씨의 죄가 신원되었고, 광산이씨 가문의 성쇠를 함께했던 괘고정 또한 살아났다고 하니 나무의 신이함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