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2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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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龍喆 |
영어공식명칭 | Bak Yongcheol |
이칭/별칭 | 용아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박찬모 |
출생 시기/일시 | 1904년 - 박용철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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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박용철 『시문학』 창간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 박용철 『문예월간』 간행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 박용철 『문학』 간행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 박용철 『동아일보』에 「을해시단총평」 게재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1월 - 박용철 『삼천리문학』에 「시적 변용에 대하여」 발표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5월 - 박용철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70년 - 광주공원 내에 '용아 박용철 시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5년 - 송정공원 내에 '용아 박용철 시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2001년 - 박용철 은관문화훈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 광산문화원 '용아 박용철 문학상' 제정 및 운영, '용아 문학제' 개최, '용아 박용철 전국백일장' 운영 |
출생지 | 전라남도 광산군 소지면 소촌리 |
묘소 |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 |
성격 | 문학가 |
성별 | 남 |
본관 | 충주 |
대표 경력 | 『시문학』 편집 겸 발행인 |
[정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 출신의 시인.
[개설]
박용철(朴龍喆)[1904~1938]은 전라남도 광산군 소지면 소촌리[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서 태어났으며, 아호는 용아(龍兒)이다. 다양한 동인지를 발간하고 대표작 「떠나가는 배」 등의 시편을 남긴 1930년대 시인이다.
[활동 사항]
박용철은 광주공립보통학교[지금의 광주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의숙(徽文義塾)과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수학하였다. 배재학당 중퇴 이후 일본 도쿄[東京]의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거쳐,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으로 조선인 학살사건 등이 발생하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편입하여 몇 달 동안 수학한 후 고향으로 돌아왔다.
1930년에 박용철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시절 절친한 관계였던 김영랑을 비롯하여 정인보, 변영로, 이하윤, 정지용과 함께 순수시 동인지 『시문학』[통권 제3호로 종간]을 창간하였다. 1930년 3월에 발간된 창간호에 박용철의 대표작인 「떠나가는 배」와 함께 「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 「싸늘한 이마」, 「비내리는 날 밤」 등 5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박용철은 『시문학』 이외에도 1931년 순수 문예 동인지 『문예월간』[통권 제4호로 종간], 1933년 『문학』[통권 제3호로 종간]을 간행하였다. 또한 이하윤, 김진섭, 이헌구 등 해외 문학파가 주축이 된 극예술연구회에도 참여하여 1934년에 창간된 기관지 『극예술』[통권 제5호로 종간]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하였다.
박용철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를 통해 1935년 『정지용시집』과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또한 1935년 『동아일보』에 「을해시단총평(乙亥詩壇總評)」을 4회에 걸쳐 게재하였다. 12월 24일에 「새로우려 하는 노력」, 12월 25일 「변설(辨說) 이상의 시」, 12월 27일에 「태어나는 영혼」, 12월 28일에 「기상도와 시원(詩苑) 5호」를 발표하여 김기림-임화-박용철 간의 '기교주의 논쟁'을 촉발하기도 하였다.
1938년 1월호 『삼천리문학』에는 박용철 자신의 대표적 시론인 「시적 변용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이와 함께 『문예월간』과 『극예술』을 통해 당시의 한국 문학을 세계 문학의 수준에 올려놓겠다는 의도에서 해외 문학의 번역과 소개에도 열의를 보였다. 1931년 무렵 입센(Henrik Johan Ibsen)의 『인형의 집』과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의 『베니스의 상인』 등을 번역하였으며, 1934년 2월 『문학』에 하우스먼(A. E. Housman)의 「시의 명칭과 성질」, 1939년 6월 『여성』에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초기 시작품인 「소녀의 기도(마리아께 드리는)」를 번역하여 실었다. 그리고 2004년에 발굴되어 알려진, 박용철의 대학 노트에 헤이그로트(R. H. Heygrodt)가 쓴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서정시, 발전사적 시도, 1921년[Die Rainer Maris Rilkes, Versuch einer Entwichlungsgeschichte, 1921]』이 번역되어 있었다. '체험'과 '변용'을 강조하는 이들의 창작론은 완성도 높은 시를 창작하기 위해 깊은 체험과 지난한 사색과 성찰을 중요시하는 박용철의 시론에 반영되었다.
1930년대 시인이자 평론가였으며, 번역가이자 문예 운동가였던 박용철은 1938년 5월 후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박용철의 사후 김영란, 김현구, 이하윤, 정지용 등이 엮은 유고 문집인 『박용철 전집』이 1939년 동광당서점에서 전 2권으로, 1940년 시문학사에서 전 3권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1975년 문학사상사에서 전 3권으로 『박용철 시집』을 발간하였다.
[묘소]
광주광역시 광산구 우산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1년 은관문화훈장이 수여되었다. 1970년 12월, 한국 신시(新詩) 운동 60주년 기념사업으로 광주·전라남도 문학인인 허연, 이동주, 범대순, 구창환, 송광헌, 백완기 등이 광주광역시 남구의 광주공원 내에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용아 박용철 시비'를 건립하였다. 또한 1985년 광주광역시 광산구의 송정공원 내에 「떠나가는 배」가 새겨진 '용아 박용철 시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광산문화원은 근대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한 박용철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7년부터 '용아 박용철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용아 문학제'를 개최하여 '용아 박용철 전국백일장'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