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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0789
한자 松竹會
이칭/별칭 송죽결사대,이문회,유신회,공주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최일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3년연표보기 - 송죽회 설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6년 - 최자혜 목포 지방 송죽회 활동 시작
최초 설립지 송죽회 - 평양
성격 항일단체
설립자 김경희, 황에스터 등

[정의]

1913년광주광역시에서 활동했던 여성 단체인 송죽회 소속 지회.

[개설]

단체의 명칭인 송죽회는 절개의 상징인 소나무와 대나무를 의미하는데, 식민지 조선의 운명을 개탄하여 민족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송죽회는 각 지역에 지회를 두었는데, 특히 목포 지방 책임자는 목포 정명여학교 출신의 최자혜였다. 최자혜는 3.1운동의 주역으로 이후 근우회 활동 등을 통해서 사회운동을 해나간 여성운동가이다.

[설립 목적]

망명지사의 가족을 돕고, 독립군의 자금을 모금하고 전달하며,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변천]

1913년 평양의 숭의여학교 교사 황에스터, 김경희, 이효덕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송죽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숭의여학교 재학생 중에서 애국심이 투철한 김옥석, 박현숙, 최자혜, 서매물, 송복신, 채광덕, 최의경, 박경애, 황신덕 등 20여 명을 회원으로 확보하였다.

송죽회 활동은 1916년 송죽회 회원들이 졸업을 하여 각 지방학교의 교사로 부임하면서 재직한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확산시켜 나갔다. 송죽회는 창립회원 20명과 회원들이 각기 거느린 지방 조직 그리고 확장 조직으로 구성되었는데, 본부는 평양에 두고 회장 1명이 전조직을 관장하였다. 지방 조직은 매월 정기적으로 평양에 모여 회비를 납부하고 사업을 보고하면서 계획 수립에 대해 토의하였다. 회원들이 철저하게 기밀을 유지하여 일본 경찰의 수사망에도 발각되지 않았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전라도 지역에서 책임자로 활동했던 송죽회원으로는 목포의 최자혜와 전주의 박현숙이 알려져있다. 최자혜는 목포 정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의 숭의여학교로 진학하여 1916년 졸업하였고, 졸업 후에는 고향인 목포로 돌아와 정명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재직하면서 양동교회에 나가 활동하면서 목포 지역 송죽회 책임자로 역할하였다. 그리고 1919년 목포에서의 4.8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박현숙은 평양 숭의여학교를 졸업한 후 전주 기전여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기전여학교에 부임하자마자 학생 5명을 뽑아 송죽회의 전주지부격인 공주회를 결성하였다. 공주회는 구국기도회를 비롯하여 설교를 통해 민족과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학습하였다. 송죽회 회원으로서 당시 광주 지역에서 활동했던 구체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송죽회는 주로 군자금을 모금하고 전달하며 망명지사의 가족을 도왔다. 매주 토론회와 역사강좌를 개최하여 민족정신의 함양과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매주 토론회와 역사강좌를 개최하였다.

[의의와 평가]

항일 여성 단체로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전달하였으며, 여성들로만 구성된 최초의 사회 단체였다.

송죽회의 회원들이 미국, 일본 등지로 유학을 가면서 국내 및 국외까지 이들의 활동이 확산되었다. 3.1운동 당시 지방에서 여성들의 참여가 많은 것은 송죽회의 조직,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3.1운동 직후에는 평양을 중심으로 조직된 애국부인회의 기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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