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6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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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耽津 安氏 |
영어공식명칭 | Tamjin An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기원 |
입향 시기/일시 | 1794년 - 탐진 안씨 안인석 입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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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탐진 - 전라남도 강진군 |
입향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
세거|집성지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 |
성씨 시조 | 안원린 |
입향 시조 | 안인석 |
[정의]
안원린을 시조로 하고 안인석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경산시의 세거 성씨.
[연원]
탐진 안씨(耽津 安氏)의 본관인 탐진은 현재의 전라남도 강진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다. 통일 신라에 들어와 경덕왕(景德王)이 탐진현(耽津縣)으로 고쳤고, 고려 때 영암(靈岩)·장흥(長興) 등으로 이속되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도강현(道康縣)과 합하여 강진으로 고쳤으며, 1895년(고종 32)에 강진군(康津郡)이 되었다.
탐진 안씨는 순흥 안씨(順興 安氏)에서 분적되었다. 탐진 안씨의 시조는 고려 공민왕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진 문숙공(文淑公) 안목(安牧)의 넷째 아들 안원린(安元璘)이다. 기록에 의하면 안원린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과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를 역임하였으며, 나라에 공을 세워 탐진군(耽津君)에 봉해졌다. 이후 안원린의 후손들이 순흥 안씨에서 분적하여 탐진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왔다고 한다.
[입향 경위]
탐진 안씨는 조선 후기에 경산 지역에 정착하였다. 경산시의 탐진 안씨 세거지는 남산면 조곡리가 대표적인데, 1794년(정조 18) 무렵에 안인석(安仁石)이 마을에 들어와 개척하였다.
[현황]
탐진 안씨는 경산 지역에 입향한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남산면 조곡리에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1993년에 조사한 경산 지역 동족 부락 현황에 따르면, 조곡리에 거주하는 총 105호 중에 탐진 안씨는 34호였다. 탐진 안씨 이외에 김녕 김씨도 24호가 조사되어 두 성씨가 공존하는 집성촌의 양상을 보였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경산시에 탐진 안씨가 377명 거주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2020년 현재 조곡리의 총가구와 인구는 119호 240명인데, 탐진 안씨는 60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관련 유적]
탐진 안씨 관련 유적으로 대표적인 곳은 조곡서원(早谷書院)이다. 조곡서원은 오성군(鰲城君) 안우(安祐)와 문정공(文靖公) 안지(安止)를 배향하기 위해 1794년(정조 18)에 건립한 서원으로,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조곡리에 있다. 배향된 두 인물 중 안우는 고려 공민왕 때 도원수로서 홍건적을 토벌하고 개성을 탈환하는 공을 세워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 안지는 안우의 4세손으로, 조선 세종 때 권제(權踶)·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용비어천가」 125장을 지어 바쳤으며, 벼슬은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조곡서원은 처음 사당으로 시작하였으나, 1798년(정조 22)에 김승술(金昇述)·서인복(徐麟復)이 상소하여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으나, 1934년부터 유림에 의해 서원석채례(書院釋采禮)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서원의 정면에는 산형 대문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인 상경재(尙敬齋)가 있다. 강당 좌우에는 동·서재(東·西齋)를 두었으며, 강당 뒤에는 사당인 충현사(忠賢祠)가 별도의 공간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