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은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100799
한자 裵恩希
영어공식명칭 Bae Eunhui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영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1월 15일연표보기 - 배은희 출생
출가|서품 시기/일시 1920년 - 배은희 교회 목사로 첫 부임
몰년 시기/일시 1966년 2월 5일연표보기 - 배은희 사망
성격 정치인
성별
대표 경력 국회의원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종교인·교육자·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개설]

배은희[1887~1966]는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20년에 목사가 되어 경주를 거쳐 전라북도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여러 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신간회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 참여하면서 일제에 끝까지 저항했으며, 광복 후에는 우익 건국운동의 전면에 나섰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절대지지 노선의 정치활동에도 투신하여 정부 고위직과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가계]

배은희(裵恩希)는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215번지에서 아버지 달성 배씨 배옥운(裵沃運)과 어머니 김해 김씨인 슬하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들 3형제 중 3남 배복석(裵福石)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재정학 교수를 지냈다.

[활동 사항]

배은희는 17세 때 기독교에 입교하여 20세부터 27세까지 대구성경학교(大邱聖經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6년부터 경산에서 포교하다 미국 남장로교(南長老敎) 계통의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들어가 4년간 공부했다. 재학 중 1919년에 평양의 3·1운동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경찰에 연행되어 태형(笞刑) 39대의 고초를 겪었다. 1919년 10월 평양에서 독립운동 비밀결사로 발족한 대한국민총회(大韓國民總會)에 가입하여 평의원이 되었다.

평양신학교 졸업 후 1920년에 경상북도 경주의 계남교회(桂南敎會)에 목사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했고, 계남학교를 세워 교장을 지냈다. 1921년 7월 전라북도 전주의 서문밖교회[西門外敎會]로 옮겨 부임하였고, 목회와 더불어 유치원, 여자야간학교, 무산아동 교육기관인 숭덕학교(崇德學校), 생민중학원(生民中學院)을 연이어 설립하고 교장 또는 원장이 되어 교육사업에도 힘을 많이 썼다. 1927년 5월 신간회(新幹會) 전주지회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1년간 재임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전주사회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전라북도청 학무과의 신사참배 강요에 차라리 숭덕학교를 폐교하겠다면서 맞섰는데, 가중되는 탄압에 신병이 겹친데다 대부분의 다른 목회자들이 굴복하는 것에 실망하여 목회 활동과 교육 사업을 중단하였다. 1946년 서울의 승동예배당(勝洞禮拜堂)에서 조선예수교장로교회 남부총회가 결성될 때 회장으로 선출되면서 배은희는 암흑기에도 기개를 지킨 교계 지도자로 우뚝 섰다.

배은희는 8·15 광복 직후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주변의 신망을 업고 우익 건국운동 중심의 정치활동에 나섰다. 1946년 초 이래로 1년간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한국민족대표자회의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전라북도 대표, 전국대표대회 임시의장 또는 의장, 중앙위원, 부위원장 등의 요직을 맡거나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47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참가를 주장했다가 4월에 서울 운현궁(雲峴宮)의 독촉국민회 사무실에서 극우조직원의 테러를 당했고, 암살 위기도 두 번 겪었다.

1948년의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 때 전주에서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하였다. 얼마 후 9월에 국무위원 급의 고시위원장(考試委員長)으로 임명되어 1951년 12월까지 재임하였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10월에 여당(與黨)으로 급조되는 대한국민당(大韓國民黨)의 창건을 주도하고 최고위원이 되었다. 1949년 이후로 1951년까지 전국애국단체연합회 부회장, 민족진영강화위원회 상무위원, 일민주의보급회 고문, 구국총력연맹 부위원장. 국토통일촉진국민대회 준비위원회 대표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52년 2월의 경북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민주국민당 서상일(徐相日)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고, 7월의 국회의장 선거에서는 47표를 얻은 차점자가 되어 신익희(申翼熙)에 밀렸다. 1952년 10월 원외(院外)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의원부(議院部) 대표와 중앙위원을 지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 때 자유당 후보로 달성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낙선하였다. 1955년 자유당을 탈당하고 1956년 4월 공화당(共和黨) 창당 때 장택상(張澤相)·이범석(李範奭)과 함께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는데 두 달 만에 탈당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대구갑(大邱甲)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3위로 낙선하였고, 1960년의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참의원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66년 대구광역시 동구 방촌동 1106번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사상과 저술]

배은희는 1928년 신경쇠약 증세로 금강산에 들어가 요양할 때 우연히 만난 강순명(姜順明)과 의기투합하여, 기독교 신앙으로 농촌을 살리려는 독신전도단(獨身傳道團)을 결성하고 전라도 일원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농촌운동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두려워한 일제의 불시검거 및 가택수색 등과 전북노회가 제기하는 이단 시비 때문에 1931년경 자진 해산하였다. 관련하여 일제 당국으로부터는 시종 ‘민족주의자’로, 교단으로부터는 ‘기독교사회주의자’로 지목받았다. 1948년 대한국민당 창건을 주도할 때는 이승만이 제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를 기치로 내걸었고 일민주의보급회 고문도 지냈으며, 그 후 1955년까지는 시종여일 ‘이승만 절대지지’ 노선을 고수하였다.

저서로 『기독교는 무엇인가』[성서연구사, 1939], 『조선성자 방애인(方愛人) 소전』[성서연구사, 1948], 『나는 왜 싸웠나』[일한도서, 1955]가 있고, 「고시단상(高試斷想)」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기고하여 『신천지』 1950년 3월호에 실었다.

[상훈과 추모]

1986년 4월 전주시내 교회 연합으로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의 다가공원 입구에 배은희목사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2015년 12월에 전주서문교회 내 종탑 옆으로 옮겨 세워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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