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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400252
한자 正守驛
영어의미역 Jeongsu Station
이칭/별칭 청수역(淸水驛)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용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시기/일시 1894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376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7년 6월 1일연표보기
관할 지역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지도보기

[정의]

고려 시대부터 1894년까지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

[제정 경위 및 목적]

정수역(正守驛)은 고려 시대 산남도(山南道) 관할의 28개 역 가운데 하나로 설치되었다. 설치 목적은 중앙과 진주목(晉州牧)[하동군] 간의 효율적인 관계망의 구축을 위해서 요로(要路)인 지금의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 영당마을에 두었던 교통과 통신을 위한 시설이었다.

[관련 기록]

『고려사(高麗史)』 권82, 병지(兵志) 참역조(站驛條)를 보면 정수역은 산남도가 관할한 28개 역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지명은 ‘정수(正樹)’이었는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표기가 ‘정수(正守)’로 바뀐 것으로 생각된다. 1425년(세종 7) 편찬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주도(晉州道)의 진주목 역조(驛條)에는 오늘날 하동 지역에 해당하는 역으로 정수역평사역(平沙驛)이 나온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상도조(慶尙道條)에는 소촌도 승(丞)이 관할하는 역이 22개인데, 오늘날 하동군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정수역·평사역·횡포역·율원역·마전역이 나온다. 『세조실록(世祖實錄)』에 따르면 1462년(세조 8) 8월 5일 병조(兵曹)의 건의로 각도의 역참(驛站)을 파하고 역로를 정비하여 찰방(察訪)과 역승(驛丞)을 두었다. 이때 정수역율원역·마전역·횡포역·평사역과 함께 사근도(沙斤道)에 소속되었다. 사근도에는 역승 한 명을 두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30, 경상도 진주목 역원조에 “정수역은 주(州)로부터 서쪽으로 54리에 있다”라고 하였다. 1808년(순조 8) 무렵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와 부제학(副提學) 심상규(沈象奎)가 왕명을 받들어 찬진(撰進)한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군정(軍政) 편에는 사근도의 속역(屬驛)이 14곳인데, 오늘날 하동군에 속한 역은 정수역·율원역·마전역·횡포역·평사역이다.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진주목의 역원조에 “정수역은 주로부터 서쪽으로 50리에 있다. 동쪽으로 평거역이 40리, 서쪽으로 하동 횡포역이 30리, 남쪽으로 곤양 봉계역이 20리, 북쪽으로 소남역이 30리 떨어져 있으며, 중마 2필·복마 8필·역리 235명·노 102명·비 45구이다. 평사역은 주로부터 서쪽으로 119리에 있으며, 지금은 하동에 속한다”라고 하였다.

이 외에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정수역은 주에서 서쪽으로 54리에 있다”라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정수역 관련 기록을 보면 진주목으로부터 떨어진 거리를 달리 기록하고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지지』에는 54리라 하고, 나머지는 50리라 한다. 후자가 옳을 듯하다.

[내용]

정수역은 진주목 주치로부터 서쪽으로 50리에 있었으며, 동쪽으로 평거역까지 40리, 서쪽으로 하동 횡포역까지 30리, 남쪽으로 곤양 봉계역까지 20리, 북쪽으로 소남역까지 30리 거리였다. 역에는 중마 2필, 복마 8필, 역리 235명, 노 102명, 비 45구를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정수역은 고려 시대 이후 1894년(고종 31)까지 경상 우도의 큰 고을인 진주 서부 지역에서 동쪽으로 진주목, 서쪽으로 하동과 호남 지역 구례, 남쪽으로 남해현, 북쪽으로 단성현과 이어지는 역로에 존속한 역원의 하나였다.

정수역은 고려 시대 이후 조선 시대에 걸쳐 하동에서 진주로 들어올 때 거치는 역이었다. 정수역은 진주목 서부 지역의 중요 역로에 위치한 역이었는데,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 속한다.

[변천]

정수역은 고려 시대 산남도의 28개 역 가운데 하나였고, 조선 시대 들어 『경상도지리지』에는 진주 경내 소촌도 속역 15군데 가운데 하나였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소촌도 관할의 22개 역 가운데 하나였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정수역은 사근도에 속하였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진주목 역원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동지지』에는 사근도의 속역으로 나오며, 1894년 갑오개혁 때 역원제도가 폐지될 때 소멸되었다. 정수역이 위치하였던 영당마을은 1906년 진주의 서부 지역인 청암·북천·옥종 지방의 9개 리가 하동군으로 분속(分屬)될 때 하동군에 편입되었다.

[의의와 평가]

정수역은 고려와 조선 시대 진주목 서부 지역의 교통과 통신에 큰 기능을 하였던 역이었다. 『고려사』 권126, 열전 39, 조민수전(曺敏修傳)에는 1376년(우왕 2) 왜구가 진주를 침범하였을 때 조민수가 청수역(淸水驛)[정수역]에서 왜구와 싸워 13급을 참하였다고 나온다. 그리고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정수역이순신(李舜臣)이 1597년 6월 1일 백의종군 길에 잠시 쉬어 갔던 곳이자, 8월 3일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제수되었을 때 거쳐 갔던 곳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정수역이 존재하였던 영당마을은 현재 매우 한적한 곳으로 변하였지만 역원 제도가 존속되던 19세기 말까지는 제법 번창하였을 것이다. 정수역의 흔적은 현재 영당마을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영당마을 모퉁이들을 역들이라고 하는 등 지명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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