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1366 |
---|---|
한자 | - 韓人 - 獨立運動家 大岩 李泰俊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주용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83년 11월 23일 - 이태준 출생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10월 1일 - 이태준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입학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0년 - 이태준 안창호의 추천으로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 학우회 가입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1년 5월 - 이태준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졸업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1년 6월 16일 - 이태준 의술 개업 인허장 취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2년 - 이태준 중국 난징으로 망명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4년 - 이태준 몽골 울란바토르 옮김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7월 - 이태준 몽골 의료에 공헌해 국왕인 보그드 칸에게 국가 훈장을 받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 이태준 모스크바의 상해 임시 정부 지원 자금 운송 중 운게른 군대에게 체포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2월 - 이태준 사망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80년 - 이태준 대통령 표창 서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0년 - 이태준 애족장 서훈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1년 7월 - 이태준 기념 공원 몽골 울란바토르에 조성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8년 - 대암 이태준 선생 기념 사업회 출범 |
[정의]
일제 강점기 몽골에서 활동한 경상남도 함안군 출신의 의사이자 독립운동가인 이태준의 삶을 조명한다.
[개설]
이태준(李泰俊)은 1883년(고종 20) 11월 23일 아버지 이질(李瓆)과 어머니 박평암(朴平岩)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자(字)는 원일(元一)이며, 호(號)는 대암(大岩)이다. 인천 이씨이며 족보에는 ‘뜻과 기개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세브란스 연합 의학교 학적부에는 원적이 경상남도 함안이다. 호적에는 이태준의 본적이 경상북도 상주군 모서면 도안리 506번지로 되어 있는데,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 1149번지에서 전적(轉籍)된 것으로 확인된다.
호적에 의하면 동생 이차조(李且祚)[인천 이씨 족보에는 이태식(李泰植)], 제수 이찬이(李贊伊), 두 딸 이수남(李壽南)[1904년 6월 17일 출생], 이수용(李壽用)[1906년 5월 22일 출생]이 있다. 이태준의 아내 안위지(安渭址)는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호적은 일제 강점기에 작성된 호적을 전재한 것이며, 이태준의 아내는 해외 망명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둘째 딸을 낳은 후 얻은 병이 사망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몽골 정부의 공식 문서에서의 이태준은 ‘고려국 국적민 의사 리다인’이었으며, ‘다인’은 이태준의 호인 대암의 몽골어 표기이다. 이태준과 우리 애국지사들은 이태준을 대암이라 불렀다.
[상경한 이태준, 의사가 되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나라가 일제의 반식민지가 되자 서울로 상경해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근처에서 김필순과 김필순의 형 김윤오가 운영하던 김 형제 상회에서 점원으로 일하였다. 김필순은 대암에게 평생 스승이자 동지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태준은 김필순을 통해 도산(島山)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한 우국지사(憂國之士)를 만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장래 진로에 큰 영향을 받았다. 김필순의 집인 김 형제 상회는 비밀 정치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의 장소이기도 하였으며, 안창호가 김 형제 상회의 2층을 접빈실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태준은 많은 애국지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1907년(순종 1) 10월 1일 이태준은 에비슨의 권유로 여러 학생들과 함께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에 입학하였다. 에비슨은 1893년(고종 30) 캐나다토론토 의과 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제중원(濟衆院)의 원장이 되었다. 에비슨은 제중원이 1904년(고종 41) 9월 23일 세브란스 병원으로 바뀌고 난 뒤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에서 의학 교육을 담당하였다.
이태준은 1911년 5월 졸업 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하였고,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 2회 졸업생이 되었다. 함께 졸업한 학생은 이태준 외 5명이었고, 1911년 6월 16일자로 조선 총독부로부터 의술 개업 인허장을 받았다.
1911년 신민회의 회원을 비롯한 항일 지식인 700여 명을 검거 구속하여 105인에게 실형을 언도한 105인 사건이 일어났다. 신민회에 대한 일제 검거를 미리 알고 있던 김필순이 1911년 12월 31일 중국으로 떠난 뒤, 이태준도 중국난징[南京]으로 향하였다.
[신해혁명과 이태준]
이태준은 세브란스 의학교 재학 시절부터 이미 애국적 구국 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태준은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 청년 단체인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에 가담하였다. 1909년(순종 3) 10월 만주 하얼빈에서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직후, 안창호가 임치정 등 서북 인사들과 함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1910년(순종 4) 2월에 석방된 후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태준은 안창호의 추천으로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청년 학우회에 가입하게 된 것이다.
이태준이 중국난징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는 미국의 안창호에게 보낸 1912년 7월 16일자 편지에서 드러난다. 이태준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한 후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였으나 날로 심화되는 일제 침략과 탄압에 분개하고 있었는데, 1911년 10월 중국 신해혁명(辛亥革命)에 감동되어 이태준의 친구이자 스승인 김필순과 함께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필순 역시 1912년 3월 8일에 서간도(西間島) 통화현(通化县)에서 미국의 안창호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에서도 김필순은 신해혁명에 감동하여 혁명 운동에 위생대(衛生隊)로 참여하기 위해 중국행을 결심한 것으로 나타난다.
난징에서의 이태준의 생활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여비가 끊어지고 언어 장벽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중국인 기독교도의 도움으로 기독회 의원 의사로 취직하게 되었다. 이태준은 ‘의원의 직임을 착득(着得)하였사오나 5, 6삭 동안은 아주 자미 없이’ 지냈다고 하였다. 이태준은 편지를 쓴 시기에 중국의 혁명 정당 인물들과 관계를 갖기 시작하였고, 중국 혁명 세력의 학생군에 가담하던 한인 유학생들과도 교류하였다. 이태준은 이제야 비로소 독립운동 계획을 모색하면서 민족 운동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이다.
[몽골의 여래불, 이태준]
1914년 무렵 난징을 떠나 몽골의 울란바토르[庫倫][몽골어로 Huree, 러시아인들은 Urga라고 불렀고, 혁명 이후 Ulan Bataar로 개칭되었다]로 갔다. 이 당시 김규식(金奎植)이 몽골 지방에서 비밀 군관 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태준이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에 가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김규식 역시 신해혁명에 자극받아 쑨원(孫文)과의 협력 방안을 모색하려고 중국으로 망명하였기 때문이다.
1914년 가을 김규식은 서양인 상사들을 대상으로 피혁 판매업을 시작하였고,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 ‘같은 뜻을 가진 동지들의 병원’이라는 의미를 지닌 동의 의국(同義醫局) 병원을 개업하였다. 김규식은 1916년 베이징[北京] 서북방 지역과 몽골 사막 접경에 위치한 장자커우[張家口]로 갔다가 1918년 6월 이후 다시 울란바토르로 돌아왔다. 그 동안 근대 의술을 지닌 이태준은 몽골인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 몽골 왕궁에 출입하게 되었고, 몽골 활불(活佛), 즉 몽골 왕의 어의(御醫)가 되는 등 몽골 왕족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특히 몽골인들의 70~80%가 감염되는 성병(性病) 완치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어 까우리[高麗] 의사 이태준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1919년 11월 11일자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의하면 ‘신인(神人)’이나 ‘극락세계(極樂世界)에서 강림한 여래불’을 대하듯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1919년 7월 몽골 국왕인 보그드 칸(Bogd Khan)에게 국가 훈장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 국가 훈장은 ‘귀중한 금강석’이라는 뜻을 가진 ‘에르데나-인 오치르’라는 명칭의 훈장으로서 제3등 제1급에 해당하는 높은 등급의 훈장이었다.
[김원봉과 이태준의 만남]
이태준은 몽골 사회에서 근대 의술을 베풀면서 두터운 신뢰를 쌓았고,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면서 중요 비밀 항일 활동에서 큰 공적을 남겼다. 장자커우에서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십전 의원(十全醫院)을 개업하고 있던 김현국과 긴밀한 연락을 하면서 장자커우와 울란바토르 사이를 오고 가는 애국지사들의 숙식을 비롯한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되는 김규식에게 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독립신문』 1919년 9월 23일자 기사에서 ‘감하의연……이대암 은 십 원(感荷義捐……李大岩銀十元)’이라는 부분은 이태준이 독립 자금을 기부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인천 이씨 족보에는 이태준이 상해 임시 정부(上海臨時政府) 군의관 감무(監務)로 활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태준은 한인 사회당 주도로 소비에트 정부로부터 확보한 코민테른[제삼 인터내셔널] 자금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 운송에도 깊숙이 관여하였다. 이태준은 당시 한인 사회당 연락을 담당한 비밀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 여름 모스크바의 레닌 정부는 상해 임시 정부에 200만 루블의 금괴 지원을 약속하였고,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의 금괴가 한인 사회당코민테른 파견 대표 박진순(朴鎭順)과 상해 임시 정부 특사 한형권(韓馨權)에게 지급되었다. 울란바토르에서 베이징까지 이 자금의 운송을 책임졌던 사람이 이태준과 조응순(趙應順) 등 한인 사회당의 비밀 연락원이었다. 12만 루블의 금괴가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자 김립(金笠)이 8만 루블, 이태준이 4만 루블의 금괴를 베이징으로 운송하였다. 우선적으로 1차분 8만 루블은 김립이 이태준의 도움을 받아 울란바토르, 장자커우, 베이징을 거쳐 1920년 초 상하이(上海)로 운반하였다. 하지만 나머지 2차분 4만 루블은 후일 이태준이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1890~1946] 일당에게 잡혀 피살되면서 분실되고 말았다.
이태준은 의열단(義烈團)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모스크바 자금 가운데 김립이 책임졌던 12만 루블 중 1차분 8만 루블의 운송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후 이태준은 베이징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의열단 단원들은 질 낮은 폭탄의 불발로 아까운 생명을 잃게 되는 등 손실이 커 우수한 폭탄 제조자를 원하는 상황이었다. 이태준은 우수한 폭탄 제조 기술자 마쟈르가 도울 것이라 장담하며 베이징에서 장자커우를 거쳐 울란바토르로 돌아갔다.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서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부대에 붙잡혀 피살되었다. 하지만 마쟈르는 홀로 베이징으로 가서 김원봉을 찾게 된다. 이 장면은 박태원(朴泰遠)의 『약산과 의열단』에서 감동적인 과정이 매우 극적인 필치로 잘 표현되고 있다.
마쟈르는 울란바토르에 체류하고 있던 포로 출신의 헝가리인으로 자동차 운전수로서 이태준의 활동을 도왔다. 마쟈르는 의열단에게 절실히 필요하던 우수한 각종 폭탄을 성공적으로 제조하였고, 이로 인해 의열단은 효과적인 테러 공작을 수행할 수 있었다. 마쟈르는 의열단의 폭탄 운반에도 참여하였고, 미수로 그친 황옥 경부(黃鈺警部) 사건, 김시현(金始顯) 사건을 비롯한 의열단의 파괴 공작에서 활동하였다.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독립 자금과 이태준의 최후]
이태준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러시아 백위파 운게른 스테른베르그 군대가 울란바토르를 점령한 1921년 2월이었다. 운게른은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미친 남작[Mad Baron]’이라 불리었다. 운게른 부대는 몽골 국왕 보고드 칸과 봉건 귀족들의 협력을 받아 1921년 2월 3일 울란바토르를 점령하고 있던 중 중국 군벌을 분쇄하고, 2월 4일 완전히 점령하였다. 울란바토르를 점령한 운게른 부대는 유태인을 학살하였고, 러시아인·부리야트인을 강제로 군대에 편입시켰으며,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태준은 울란바토르에 남아 있었다. 이유는 코민테른 자금 4만 루블의 운송 책임과 김원봉에게 소개할 마쟈르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21년 2월의 어느 날 이태준은 새로운 베이징 정부가 발행한 통행 허가증을 휴대하고 우르가[울란바토르의 옛 이름]를 떠나 베이징으로 향하였다. 김원봉에게 소개할 마쟈르도 동행하였다. 하지만 운게른 군대를 만나 총살당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 주는 기록이 있다. 이태준이 피살된 후 8개월 지나 작성된 문서가 있는데 이동휘(李東輝)와 박진순이 소비에트 정부의 외무 인민 위원회에 제출한 1921년 10월 16일자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이태준은 운게른 군대의 울란바토르 점령과 약탈 수색으로부터 4만 루블의 금괴를 보호하는 데 성공하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에게 소개할 폭탄 제조 기술자 마쟈르와 함께 4만 루블의 금화를 가지고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태준 일행은 울란바토르의 운게른 도당으로부터 시달(示達)된 체포 명령에 따라 울란바토르로 압송되어 총살되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운송하던 4만 루블의 금도 탈취되고 말았다.
이태준의 최후에 대해서는 운게른의 참모였던 마케예프(Makeev)의 회상록에 수록되어 있다. 이 회상록에 의하면 이태준은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하여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운게른의 살인조에 의하여 잔인하게 처형되었다. 이태준의 집에는 11개월 된 딸아이가 있었는데 이미 사망하여 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태준의 집에서 일하던 러시아 여자 하인들 역시 운게른의 부하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태준은 애국적 항일 활동 과정에서 총살되었다. 즉 모스크바 자금의 운송 등 친볼세비키 활동 때문에 이국땅 몽골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태준의 나이 38세에 불과하였다.
[이태준에 대한 기억과 기념]
이태준의 일대기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널려 알려져 있었다. 여운형(呂運亨)은 1921년 가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원동 민족 혁명 단체 대표회에 참가하기 위해 러시아로 가던 길에 울란바토르에 체류하였다. 이때 이태준의 묘를 찾았다. 그 후 15년 만인 1936년 『중앙』 5월호에 실린 「몽고 사막 여행기」라는 글에서 이태준을 애도하였다. 김규식도 이태준에 관한 회상을 남겼다. 1949년 7월 5일 자기 집을 방문한 이태준의 문중 친척인 이인섭(李仁燮)에게 이태준의 이야기를 전한 것이다. 조소앙(趙素昻)도 함안군 군북면을 찾아와 마을 사람들에게 이태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였다. 그리고 “대암이 함께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애석해 하였다.
이태준은 독립운동의 공적이 인정되어 1980년 대통령 표창이 서훈되었다. 1990년에 애족장이 서훈되었다. 이태준을 기념하는 공원이 2001년 7월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조성되었다. 공원은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과 몽골 연세 친선 병원, 그리고 한국 주재 몽골 대사관의 노력에 힘입었다. 공원 조성 시 몽골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였고, 연세 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가 비용을 조달하였다. 이태준이 한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이 된 것이다. 이태준의 고향 함안군에서는 2008년 이태준 선생 기념 사업회가 출범하여 국제 학술회의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