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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지역 최초의 교회, 남양교회와 수촌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18
한자 華城지역 最初의 敎會, 南陽敎會와 水村敎會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은선

[정의]

경기도 화성 지역에 최초로 설립된 남양교회수촌교회의 역사와 역할.

[화성 지역에 교회가 설립되다 : 남양교회(1897)와 수촌교회(1905)]

남양교회의 시작은 경기연회가 제공하는 감리교회주소록에 따르면 1897년 4월 7일로 기재되어 있다. 향토사학자 홍승길에 따르면 남양감리교회는 1899년에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으며, 복정채는 신학월보에서 1900년 4월부터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한다. 홍승길에 따르면 "1899년에 남양교회는 존스 선교사가 제물포에서 파송한 복정채가 주로 예배를 인도하였으며, 존스 선교사가 순회 지도하였다. 교인으로는 남양 사람으로 서울에서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받아 신앙생활하던 홍승하 씨 가정과 홍사두[부인 안엘리사벳] 가정, 한가울에 사는 김홍수[전 죽산군수] 씨 가정 외 한 가정, 활화문 김치도 씨 가정 외 두 가정, 글판리 김병권[목사됨] 씨 가정과 이 씨[이동만 씨 부친, 후에 목사됨] 가정 외 한 가정으로 낮 예배는 남양읍의 홍승하 씨 가정에서 드리고 밤에는 글판리 김병권씨 댁과 이씨 댁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러한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남양교회 설립에서 김홍수, 복정채, 홍승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홍수는 남양과 죽산에서 하급장교를 한 후에 1896년부터 1899년 3월까지 죽산군수를 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에 가서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 죽산에서 선정을 베푸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백성들을 계몽하며 독립협회에 가입했던 개화파 관리였다. 1899년 3월에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와서 예수를 전도하여 처음으로 읍중에 두 집의 믿는 집이 생겨났다. 그러므로 남양교회가 세워지는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개화파 관리였던 김홍수였다.

남양교회 설립에서 중요한 역할을 또 다른 인물들은 내리교회를 세웠던 존스 선교사와 그가 파송했던 매서인 복정채였다. 존스선교사는 1897년경부터 남양에 매서인을 파송했는데, 그가 파송했던 매서인이 복정채였다. 그는 인천에서 서당을 운영하다가 1890년에 해주를 방문하여 복음을 받아들였고 1896년 10월에는 인천 담방리 자신의 집에 교회를 세웠다. 그는 존스 선교사의 지도하에 남양에 와서 매서인 역할을 하였으며, 1900년 4월부터 정기적으로 남양지역을 방문하여 주일예배를 인도하였다. 김홍수와 복정채의 활동으로 설립된 남양교회에서 실질적으로 속장이 되어 남양지역에 복음을 전파한 지도자는 홍승하였다. 남양의 영흥도에서 출생한 홍승하는 다양한 경로로 복음을 접하였다. 첫째는 1899년에 은퇴하고 고향에 돌아온 김홍수를 통해 접하였다. 김홍수가 읍내의 두 집에 전도하여 믿었는데 홍승하와 홍사두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전부터 복정채가 판매하는 기독교 서적들을 통해 복음을 접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서울에서 이미 복음을 받아들였던 남양홍씨 가문의 홍정후와 홍난파의 아버지 홍준 등이 1890년대 초에 이미 새문안교회 교인이었으므로 서울에 왕래하며 이들을 통해서도 복음을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남양교회는 인천내리교회와 김홍수의 개화세력과 남양의 토착세력인 홍승하가 함께 협력하여 세웠다.

수촌교회남양교회에 출석하던 김응태 속장을 중심으로 7명이 1905년 3월 5일 정창하씨 댁에 모여서 예배는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수촌교회가 세워질 때 남양교회 담임전도사는 박세창이었고, 이건숙은 권사로서 남양교회 속장이었는데 수촌교회를 순회하며 돌보는 교역자였다. 1907년 7월 3일에 수촌리 큰말 소재의 초가 15칸을 매입해서 예배당으로 수리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이후 수촌교회의 성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1910년 7월에 작성된 “남양군 장안면 수촌 야소교회 형제자매 가적(家籍) 생명부록”인데, 이 문서를 분석해 보면 1910년대에 123명이 등록되어 있어 상당한 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화성 지역에 근대교육이 시작되다.]

화성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된 후 근대교육이 시행되어 남자학교 11개와 여자학교 10개가 세워졌다. 남자학교는 보흥학교와 폴웰학교, 9개의 교회에 세워진 9개의 순회주간학교, 여자학교로는 제하여학교와 9개의 교회에 세워진 순회주간학교였다.

1. 기독교 남자 사립학교의 설립

남양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제일 먼저 세운 학교는 보흥학교이다. 보흥학교는 1901년 8월에 인천 내리교회 목회자였던 존스(G. H. Jones) 선교사의 후원금을 지원받아 홍승하권사가 설립하였다. 그는 보흥학교가 세워질 때 선친 홍윤선의 사당터를 학교 건물로 제공하였다. 보흥학교에서는 언문, 산수, 교양 등을 가르쳐 무지에서 탈피하고 봉건적인 악습에서 벗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가르쳐 영생을 얻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창회는 1902년에 영어를 교육하는 폴웰학교를 설립하여 11명의 총명한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03년에 상동교회에서 활동하던 백(S. A. Beck)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박세창이 교사가 되어 남녀 15명을 가르치는 양철리 교회 학교가 설립되었다. 양철리 교회에 소학교가 설립된 것과 같이 남양지역의 다른 교회들에도 소학교가 설립되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1905년에 버딕(G. M. Burdick) 선교사는 “남양구역에는 순회남학교가 있는데, 이것은 각 교회마다 2년 중 3달 동안 선생의 혜택을 받게 해 준다. 같은 계획 하에 여학교도 운영된다”고 보고하였다. 남양구역에 세워진 9개의 교회들마다 학교가 세워져 있었는데, 교사가 부족하여 교사가 순회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2. 기독교 여자 사립학교의 설립

남양에 최초로 설립된 여학교인 제하여학교는 홍승하에 의해 1902년 7월에 현재 남양감리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이 건물은 남양부에서 쓰던 40칸 자리 일자 기와집인 공청이었는데, 이강년 군수와 교섭하여 양여 받은 것이었다. 이 학교는 홍승하와 제물포 구역 소속의 밀러(Lula A. Miller) 여선교사의 지원으로 육성되었으며, 교과목은 언문과 산수 등을 주로 하였다. 이 여학교의 한국인 선생은 안 이리사벳인데, 밀러 선교사의 1904년 보고에 따르면 “올 해 두 개의 주간학교[day school]가 있는데, 남양의 이리사벳은 자원봉사자로서 보고를 했고, 우리는 이리사벳에게 전도부인의 일과 같은 순회 주간학교 교사를 하도록 요청하였다.” 밀러 선교사와 함께 당시 수원지역을 담당했던 힐만 선교사는 안 이리사벳이 “한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모으고 그들이 읽고 쓰고 간단한 산수를 할 수 있을 때까지 남아 있었다. 때때로 이 지방에서는 한꺼번에 8개 또는 9개의 이러한 학교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가정학습과 더불어 부녀자들과 소녀들로 하여금 사경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역할을 해 주었다.” 그녀는 여성들을 위한 주간학교에서 소녀들뿐만 아니라 부녀자들에게도 글자를 가르쳐 이들이 성경을 배우는 사경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이러한 문자 교육은 당시의 무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명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였다. 한글을 배운 소녀들과 부녀자들은 남양지역이나 인천과 수원 등지에서 열리는 사경회에 참여하여 교육을 받았다.

3. 을사늑약 이후 기독교 학교의 발전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에 교육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화성에서도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기관찰사 최석민은 1907년에 사숙, 의숙, 서당을 폐지하는 대신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하라는 훈령을 내려 이후 관내 군수들뿐만 아니라 유지신사들이 적극적으로 근대교육기관을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화성에서 기존의 학교들 외에 19개의 새로운 학교들이 세워졌다. 남양에 신설된 학교들은 1906년 남학교인 양성학교, 상동소학교, 그리고 여학교인 양정의숙, 보흥여학교 등 5개교, 1907년에 노동야학교 1개교, 1908년에 송림학교와 배영학교 등 7개교가 세워져 13개 학교가 설립되었다. 서여제면에 1907년에 전곡사숙과 유신학교 등 3개교가 세워졌다. 전곡사숙은 기독교인 최성대가 숙장이 되어 운영하면서 애국가를 작곡하여 가르쳐 애국심을 고취하였고, 다른 학교들은 유학자들이 운영하였다. 송산면에서는 1906년에 교회가 세운 보성소학교와 1907년에 명달의숙, 그리고 사강교회의 매서인인 곽응환이 세운 보명학교 등 3개교가 세워졌다.

이러한 학교들 가운데 기독교인이나 교회들이 세웠던 학교는 보흥여학교와 송산면의 보성소학교와 보명학교이다. 그와 함께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했던 학교들은 전곡사숙과 함께 이창회가 운영에 가담했던 여러 개의 학교들이 있다. 이창회는 강창희, 홍익선, 그리고 정시현등과 함께 문명적 급선무를 생각하여 의연금을 모아 상동소학교를 설립하여 청년 학생들을 열심히 교육하였다. 양성학교 운영에도 이창회최성대등 비롯한 많은 기독교인이 깊이 관여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김홍수의 아들인 김관현은 송림학교의 임원이었다. 이와같이 이 시기에 세워졌던 사립학교들은 대부분이 전현직 군수인 방한덕, 박용관, 그리고 김관현 그리고 이 지역의 개화된 유학자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다.

보흥소학교는 1906년 3월에 장호진 군수의 청원으로 정식 학교로 인가받았다. 이 때 학교운영자였던 이창회 권사는 학생이 늘어나 새 건물을 지을 필요가 생겨나자 대한자강회의 지원을 받으며 유림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1907년 11월 학교 건물낙성식을 할 때에 향교 재산의 반을 이전받았다. 이 학교에 대해 1908년 8월에 남양금융조합 이사색천(色川元市)이 탁지부대신 임준선에게 “이곳 지방민의 상황을 말씀드리면 극히 악질로 배일사상이 가장 극렬한 곳”이라고 보고하였다. 당시 남양에 설립되어 있던 학교들 가운데 대부분 초등학교 과정만 운영되었는데, 보흥학교와 보흥여학교는 양성학교와 함께 초등학교 과정인 심상과 뿐만 아니라 중학교 과정인 고등과가 설치되어 있었다.

남양에서 1906년에 남양군 세곳면 당산동 교회에 설립되어 있던 사립보성학교가 그 해 5월부터 제일 먼저 야학교를 설치하고 학생들을 모집하여 훌륭한 선생님을 초빙하여 국한문, 산술, 번역, 법률 속성과를 운영하였다. 이 학교의 수업과목은 산술, 번역, 법률 등 개화된 사회에서 요구되던 상당히 실용적인 학문을 가르쳤다. 보흥학교도 1907년에 주간에 공부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박윤영이 야학을 운영했는데, 학생 숫자가 29명에 달하였다.

4. 수촌교회의 장진학교

김응태는 수촌교회에 장진학교를 설립하여 성경, 국어, 음악을 가르치다 후에 미술, 체육도 추가되었다. 이와 같이 김응태는 수촌교회를 세우면서 동시에 근대교육을 실시하고자 교회안에 장진학교를 세웠다. 그래서 수촌교회는 지역사회에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의 근대의식을 일깨우는데도 일조를 하였다.

[화성 지역 교인들,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다.]

1. 기독교학교의 국채보상운동 참여

1907년에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남양에 있던 19개 학교 가운데 보흥학교와 보흥여학교와 공립소학교의 3개교가 참여하고 있다. 보흥학교는 1907년 5월 14일에 대한자강회 지회와 함께 제일 먼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직원인 박윤영과 학생들 28명이 참여하여 합계 4환 92전 5리를 모금하였다. 보흥여학교의 참가자 명단이 1907년 10월 17일자 황성신문에 게재되어 있는데, 9환 71전 5리를 모금하였다. 이 명단을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점은 안 이리사벳, 홍 미시다, 홍 이뱃가, 홍 눗써 등 여러 명의 여성들의 이름이 성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성들이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세례줄 때 선교사들이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대부분 성경의 이름을 음역한 것이었다. 그와 함께 이름을 표기할 때 서양식으로 이름이 먼저 나오고 성이 뒤에 나오고 있다. 그와 함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이름이 없이 누구의 조모, 모친, 부인, 형수 등으로 호칭되고 있다. 그리고 이 학교를 후원하는 찬성원은 김신덕 홍 미시다 홍 이뱃가 사쳔죠모, 명슌모친 황, 성슌모친 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2. 기독교인들의 대한자강회 남양지회와 의성회의 설립과 활동

윤치호를 회장으로 1906년 4월에 조직되어 실력양성을 통한 자강운동을 추진했던 대한자강회는 이창회가 요청했던 남양지부 설립을 1906년 8월에 승인하였다. 설립 당시에 회원 수가 37명이었는데, 다음 해 1월에는 43명으로 증가하였다. 대한자강회 지부는 이창회 주도하에 향교 토지의 절반을 이전받았고,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3월 29일에 남양군의 국채보상의연금 수집 본부를 지회에 설치하고 가장 먼저 국채보상금을 모금하여 5월 14일에 25명이 25환을 모금하였다. 이 가운데 기독교인으로 확인되는 사람은 강창희, 홍남선, 이창회, 김광식, 강주희, 박영석, 박윤영, 홍덕표, 홍기표, 최성대 등이다. 대한자강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의 열기는 기독교인이면서 서여제면장인 최성대와 홍은후를 중심으로 한 남양군염업회의소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들은 염업회사를 조직하여 일제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재정자립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을 하고자 하였다.

여성들 가운데 기독교를 수용한 후에 의식이 각성되어 조직을 만들어 애국계몽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1907년 4월에 남양군 읍내의 기독교인인 김희경, 김혜경, 안마리아 등 3인이 국채보상 운동을 위해 의성회를 조직하고 116명의 유지부인들에게서 43환 6전을 모급하였다. 그리고 이 의성회를 만든 부인들은 계속해서 같은 달에 여자교육회를 조직하였다. 의성회와 여자교육회의 활동으로 여러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여 양성학교의 찬성금[후원금]을 낸 명단에 김진구 모친, 김복원 모친, 최일만 모친, 홍종선 모친 등 4명의 여성이 들어가 있다.

[화성 지역 교인들, 3·1운동에 적극 참여하다.]

수촌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중요한 지도자로 등장한 인물이 1912년 봄에 장안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서 담배를 끊기로 결단한 김교철이었다. 김교철은 1880년 수촌리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했으며, 이미 1907년에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20전을 기부하였다. 그는 처음에는 유학에 물들어 기독교를 박해하였으나, 나중에 기독교를 택하게 된 동기는 이왕에 힘이 될 만한 종교를 선택할 바에야 서양의 종교를 택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여 기독교를 선택하였다. 그는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는 “이렇게 좋은 교가 있는 것을 왜 몰랐던가”하고 상투를 자르고 매일 동리가 찌렁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찬송을 부르며 대단히 열심히 예수를 믿었다. 그는 예수를 믿은 직후 단신으로 서울로 올라가 선교사의 소개로 1911년 배재학당에 들어가 3년 과정을 1년 만에 마쳤다. 그는 1912년 봄에 열린 사경회에서 은혜를 받은 후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려고 1912년 가을에 언더우드가 세운 피어슨 신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교회가 운영하던 장진의숙을 통해 인재 양성에 힘쓰는 한편 1916년 3월에 남양교회 담임전도사로 파송되었다. 그는 1918년 동석기 목사가 올 때까지 수촌에 거주하면서 남양 일대를 순회하면서 목회하였다.

김교철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수촌리교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지도하였다. 김교철은 천도교의 백낙열(白樂烈) 전교사와 유교의 지도자 차희식과 연합으로 수촌리 3·1운동을 일으켰다. 4월 3일 수촌리 교인들은 밀양산에 모여 김교철전도사와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수촌리, 장안리, 석교리 주민 2000여명이 참여하여 가와바타 순사를 처단하였고 우정면 면사무소와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웠다. 이러한 과격한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에 수촌리 교회가 불탔고 40여호의 민가들 대부분이 불탔다. 이 시위 참여자들 가운데 김교철 전도사가 2년 6개월의 형을 언도받았고 수촌교회의 배재고보 재학생이던 차인범은 옥사했으며 4명의 교인이 2년 6개월에서 3년형을 받았다. 지금 수촌교회에 이 때 불탔던 초가교회가 복원되어 있다.

[교회의 역사가 화성의 역사로]

화성 지역 교회들은 화성시의 근대화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유교전통이 화성지역을 지배하던 상태에서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며 새로운 탈바꿈을 하게 되는데 교회는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교회가 화성지역의 근대화에 공헌한 것은 첫째는 근대교육이 교회를 통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화성에는 화성향교가 있었지만, 새로운 근대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화성지역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유교와는 다른 서양의 근대교육을 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요청되었다. 이러한 근대교육을 충족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인천 내리교회의 존스 선교사였고, 화성의 기독교를 수용한 새로운 지도층들의 호응이었다. 존스와 밀라 선교사의 후원을 받아 홍승하와 안이리사벳의 지도 하에 남양 보흥학교와 제하여학교가 세워졌다. 그리고 각 지역에 세워진 교회들에 순회학교가 세워져 근대교육을 실시하였다. 교회가 앞장 서서 근대교육을 실시하자 지역의 다른 유지들도 많은 근대교육기관들을 설립하였다.

그와 함께 이창회는 남양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대한자강회 남양지회를 설립하였고, 여성기독교인들은 의성회와 여자교육회의 지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이 조직되어 활동한 결과로 화성지역은 1907년에 진행된 국채보상운동에 지역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각 지역에서 근대교육을 받아 각성된 사람들이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이 남양지역에서 전개될 때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바로 수촌교회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 이 지역 출신이었던 김교철이었다. 김교철은 유학자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인데,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목회자가 된 후에도 교인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3·1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수촌교회는 불타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때의 3·1운동 정신을 계승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남양교회는 1930년대에 어려울 때에 33인의 한 사람이었던 이필주 목사가 내려와 목회를 하면서 민족의 지조를 지키며 교회를 부흥시켰다. 그리하여 지금도 남양교회에는 오화영 목사가 쓴 기념비문과 1969년 허숙일 목사가 제작한 기념비 두 개가 세워져 있고, 그의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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