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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379
한자 丙子胡亂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기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36년 12월 1일연표보기 - 병자호란 발발
종결 시기/일시 1637년 1월연표보기 - 병자호란 종결
전개 시기/일시 1637년 1월 31일 - 병자호란 광교산전투에서 조선군 승리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김준룡|양굴리|윤계

[정의]

1636년 12월부터 1637년 1월까지 경기도 화성 지역을 포함한 조선 서북부 및 중부 지역에서 벌어진 청나라와의 전쟁.

[역사적 배경]

1627년 1월에 발생한 정묘호란의 결과, 조선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교역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후로도 후금은 변경 지방을 침입하여 약탈하는 등 수시로 조선을 도발하였다. 나아가 만주 점령 후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를 압박하는 과정에서는 형제의 맹약을 군신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하였을 뿐 아니라, 황금과 전마(戰馬), 정병 3만 명을 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후금에 대한 척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그로 인해 두 나라 간 긴장이 팽배해지게 되었다. 1636년 4월,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때 수차례에 걸쳐 조선의 왕자와 척화를 주장하는 신료를 볼모로 보내어 군신 관계를 맺을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당시 척화 의지가 고조되었던 조선에서는 청의 요구를 거부하였고, 결국 청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 부른다.

[경과]

1636년 12월 1일, 조선을 침략한 청군은 빠른 속도로 한양으로 진군하였는데, 그로 인해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한 인조는 조정의 신료들과 함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화성 지역 역시 극심한 전쟁의 피해를 겪게 되었다. 당시 수원도호부사 구인후(具仁垕)가 인조를 보위하기 위해 수원과 인접 지역의 병사를 이끌고 남한산성에 들어갔고, 조선 초 화량진에 두었던 경기수영은 정묘호란 직후 강화도 교동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화성 지역의 방어 체계는 이미 무력화된 상황이었다.

12월 29일, 국왕의 근왕병 소집 명령에 따라 전라감사 이시방(李時昉)과 전라도병마절도사 김준룡(金俊龍)은 전라도 근왕병 6,000여 명과 화엄사 승려 각성(覺性)이 이끄는 승병 2,000여 명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이들 중 김준룡이 이끄는 선봉군은 1637년 1월 4일 남한산성에서 남쪽으로 40리 정도 떨어진 광교산에 진영을 구축하였다. 이에 청 태종의 매부인 양굴리[揚古利]는 병력 7,000여 명을 이끌고 광교산과 남한산성의 연결을 끊고, 광교산을 포위하였다. 청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수차례에 걸쳐 화포 사격을 감행하였으나, 전라도 근왕병은 광교산의 지리를 활용하여 필사적으로 청군의 공격에 맞섰다. 여러 차례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과를 거두지 못한 청군은 1월 31일 양굴리가 직접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교산을 공격하였다. 그럼에도 청군은 광교산을 점령하지 못하였고, 양굴리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되면서 전투는 조선군의 승리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병자호란 시기 화성 지역에서는 의병 활동도 전개되었는데, 남양도호부사 윤계(尹棨)의 활동이 대표적이다. 윤계병자호란 발발 후 근왕병을 모집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청군에 잡혔고, 끝까지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윤계와 함께 의병에 참여한 부리(府吏) 홍신(洪信), 홍언인(洪彦仁), 김택(金澤)은 윤계를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윤계는 이후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부리들은 현종 때 증직되었다.

[결과]

광교산전투는 병자호란에서 벌어진 전투 중 조선군의 가장 큰 승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전투 후 김준룡의 조선군은 물자와 식량이 고갈되었기 때문에, 근왕병 본진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며 수원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안성에 머물렀던 전라도관찰사 이시방과 근왕병 본진은 김준룡의 선봉군이 광교산에서 패배하였다고 오인하였다. 이시방은 지휘권을 남겨놓고 공주로 달아났으며, 조정에서는 김준룡을 수원으로 철수하였다는 이유로 파직시켰다. 그 결과 전라도 근왕병은 지휘 체계가 무너져 사실상 와해되었다.

[의의와 평가]

광교산을 비롯한 화성 지역은 당시 인조가 피난한 남한산성과 인접하여 있어 호남에서 상경하는 근왕병의 집결지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청군은 근왕병이 남한산성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청 태종의 매부를 지휘관으로 삼아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교산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하였고, 여기에 의병 활동까지 더해지며 청군의 남한산성 공격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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