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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19
한자 露雀 洪思容과 그의 文學世界
영어공식명칭 Nojak Hongsayong and his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곽명숙

[정의]

경기도 화성시 출신의 일제 강점기 시인이자 연극인.

[개설]

홍사용의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호는 노작(露雀)이다. 1920년대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근대 시인이자 연극인이다.

[화성에서 보낸 유년기]

홍사용(洪思容)은 본명이고, 아호는 노작(露雀), 소아(笑啞), 백우(白牛), 별명으로 ‘돌부처’, ‘고고문사(枯高文士)’, ‘대리석’, ‘고양이’, ‘열두 박사’ 등이 있다. ‘열두 박사’는 홍사용이 아는 것이 많다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홍사용은 1900년 음력 5월 17일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 151번지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육군헌병 부위를 지낸 홍철유(洪哲裕)와 어머니 능성(綾城) 구씨(具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관학교 1기생으로 합격한 부친을 따라 백일 즈음에 서울 재동으로 이주했다. 8세 무렵 군대가 해산되자 다시 아버지를 따라 생가 인근 마을인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돌모루] 492번지로 내려온다. 9세가 되었을 때, 후사 없이 일찍 돌아가신 백부 홍승유(洪升裕)의 양자로 들어갔다. 친부와 백부 일가가 용인과 화성 일대에 많은 농토를 소유한 천석지기였기에 홍사용은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홍사용의 고향인 돌모루[석우리]는 주로 남양 홍씨들이 모여 사는 씨족 마을로, 용수골과는 언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수원 동남방향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여 있고, 마을 뒤로 주봉뫼라는 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 현량포[현량개]라는 냇가가 있다. 홍사용은 학창 시절 고향에 돌아올 때 수원성 둑길을 자주 걸어오곤 했다고 한다. 화성(華城)은 광교천 위에 화홍문이 있고, 그 동편으로 연무정과 장군대가 있다. 지금도 옛 성에 봉화대 윤곽이 남아 있다. 홍사용의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에는 봉화대와 장군바위 등과 같이 고향의 여러 정경이 등장하는데, 홍사용의 문학세계를 이루는 정신이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시 「통발」에는 어린 시절 냇가에서 고기 잡던 천진난만한 아이의 경험이 등장하기도 한다.

화성 돌모루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며 휘문의숙에 입학하기 전까지 홍사용은 집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조혼 풍습에 따라 1912년 13세에 2살 위인 원주(原州) 원씨(元氏) 효순(孝順)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혼인신고는 1915년으로 되어 있고 부인과의 사이에 1남 2녀를 두었다. 후일 이 중 딸아이를 12세에 잃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는데, 홍사용은 평생 조강지처에게 눈물만 안겨주었다는 술회를 남기기도 하였다.

홍사용은 1916년 홀로 상경하여 휘문의숙 2학년에 편입한다. 1918년 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되면서 3학년이 되었고, 1919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하기 전 3·1운동으로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4학년 정규과정을 마치고 6월에 고향에 잠시 돌아와 동학인 정백(鄭栢) 정지현과 같이 수필집 『청산백운(靑山白雲)』을 펴냈는데, 여기에서 홍사용은 ‘소아(笑啞)’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이 수필집에는 ‘현량개’를 비롯한 고향의 자연 풍경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은거하며 독서에 열중하고 시상에 잠기면서 품은, 나라를 잃은 민족적 울분과 일제에 대한 반항의 정신이 홍사용을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해 12월 홍사용은 서울에 살던 학우 월탄 박종화와 주고 받은 서신에 습작시 「푸른 언덕 가으로」를 보내기도 하였다.

[나는 눈물의 왕-습작기와 『백조』 시절]

홍사용의 문학적 생애의 시작은 휘문의숙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재학시절 학우 정백과 1년 후배인 월탄 박종화 등과 함께 『피는 꽃』이란 등사판 회람잡지를 펴냈다. 『피는 꽃』은 비록 현재 전해지지는 않지만 후일 『백조』라는 순수 문예동인지의 맹아였다고 박종화는 회고하였다. 학창 시절 홍사용은 조선어와 한문, 습자 등의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고, 인도의 민족지도자 간디를 존경했다고 한다. 박종화의 회고에 따르면 홍사용의 성격은 “꼬장꼬장하도록 강직”하며, “고고한 선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람을 끄는 힘이 많아서, 정지용, 박팔양 등 후배들이 모두 그를 사모했다고 한다.

홍사용은 1920년 5월 15일 발행된 문예잡지 『문우(文友)』지에 ‘소아’라는 필명으로 「커다란 집의 찬밥」을 발표하였다. 이 잡지의 광고 목차가 1920년 7월호 『서광』 6호에 나와 있지만, 잡지가 확인되지 않아 시의 면모를 알 수는 없다. 습작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작품들은 1919년 12월에 발간된 『서광』 창간호에 실린 산문 「어둔 밤」외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 글은 지상에 발표된 홍사용의 최초의 산문으로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쓴 것이라고 한다. 홍사용의 시가 공식적으로 활자화된 것은 1921년 10월 『동명』 7호에 민요시 「비오는 밤」이 실린 것이다.

홍사용은 재종형 홍사중(洪思仲)을 설득하여 문화사를 설립하고 문예지 『백조』를 직접 주재하여 펴냈다. 『백조』의 편집인은 홍사용이었고, 1호부터 3호까지 발행인은 일제의 간섭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외국인들이 맡았다. 3·1운동은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자주독립의 의지를 표출한 운동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의 계기가 되었다. 문학 분야에서도 1919년 『창조』 에 이어 여러 잡지들이 잇달아 출간되었고, 『장미촌』 의 낭만주의 경향을 계승한 『백조』가 탄생한 것이다. 홍사용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1922년 『백조』 창간호에 본명으로 권두시 「백조는 흐르는데 별 하나 나 하나」를 발표한 것을 비롯해 4편의 자유시 등을 실었다. 2호에는 「봄은 가더이다」 와 민요조시 「시악시 마음은」을 발표하였고, ‘생금노래’라는 경상도 구전 민요 한 편을 채록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홍사용의 대표작인 산문시 「나는 왕이로소이다」는 1923년 9월 『백조』 3호에 발표되었다. 『백조』 시절 홍사용의 초기 시는 감정의 과잉으로 표출되는 비애와 허무를 형상화한 시들이 주를 이루었다.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보인 ‘어머니’에 대한 향수, 향토적 서정, 자전적인 서사, 애절한 비극미 등에서 나오는 감상성은 그의 시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노작은 가장 어여쁜 아들이자 가장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서 자신을 쫓겨난 '눈물의 왕'이라고 부르며, "설움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라고 외쳤다. 홍사용의 시에 등장하는 모성적인 평화에 대한 갈망과 죽음의 의식은 당시 수난에 처한 민족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산문시 외에 『백조』 3호에는 4편의 시와 소설 「저승길」과 수필 「그리움의 한 묶음」 등을 수록하였다. 『백조』는 3호로 종간되었고, 그 뒤를 이어 기획하였던 『흑조』는 출판되지는 못하였다. 홍사용이 중심이 된 『백조』에는 박종화, 현진건, 나도향, 이광수 등 한국 근대문학사의 굵직한 작가들이 참여하여, 근대 문학의 대표적인 동인지로 꼽히고 있다.

[조선은 메나리의 나라]

『백조』 이후 홍사용은 자유시와 산문시 유형의 작품은 거의 발표하지 않고, 1938~1939년에 『삼천리문학』에 민요조의 시를 발표하였다. 『백조』 시절에도 자유시 외에 민요조시나 채록한 민요를 발표하기도 한 그는 평론을 통해 민요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유일한 평론 「조선은 메나리 나라」에서 조상의 소리인 민요를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며 민족주의 의식을 보여주었다. 그외 106수의 시조를 필사한 『청구가곡(靑邱歌曲)』도 남아 있는데, 홍사용의 민요에 대한 관심은 민족고유의 전통율에서 민족혼을 발견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사상의 발원이라 할 수 있다.

문학사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홍사용은 소설도 여러편 발표하였는데, 삽화적이고 심정고백적인 면이 있으나 식민지 하의 고통스러운 민족의 현실을 포착하고자 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특히 사상기생이 등장하는 「저승길」에는 간접적이지만 독립운동에 대한 의식을 보여주는 등, 일제 강점기 하의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타개의지와 비판의식을 소설 속에 우회적으로 표현하였다.

[토월회와 연극운동]

홍사용이 무엇보다 정열을 쏟았던 것은 연극 활동이었는데, 시단에서의 활동보다 연극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한 기간이 더 길었다. 1923년 토월회에 가담하여 문예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1927년 박진, 이소연과 함께 산유화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극단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0년 홍해성, 최승일과 함께 신흥극장을 조직하며 재기를 노리지만, 실패하여 방황하고 건강마저 악화되었다. 홍사용 자신이 많은 극본 제작을 하고 자신이 쓴 희곡작품을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번안 또는 번역하였다고 하나 극본 등이 전해지지 않아 활동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홍사용의 극본으로 전해지는 4편과 제목만 알려져 있는 6편이 있는데, 그중 「벙어리굿」은 인쇄 초교 검열에서 압수되었고 경기도경에 연행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김옥균전」은 일제의 의뢰로 집필하다가 사상 문제로 중단된 채 주거제한까지 받았다. 홍사용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희곡창작과 연극활동을 통해 민족사상을 고취시키고자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창작희곡이 많지 않았던 한국연극사에서 홍사용의 이러한 희곡작품들이 갖는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일제말기의 방랑과 절개]

신시운동과 연극운동으로 막대한 재산을 탕진하고 홍사용은 오랫동안 방랑생활을 하였다. 장남 홍규선의 회고에 따르면 양가의 재산 천석지기와 생가의 재산 사백석지기 전답을 몇 년 동안 탕진하였다고 한다. 그런 홍사용을 부친은 한번도 책망한 적이 없고 오래간만에 만나면 다정하였다고 한다. 홍사용은 궁벽한 처지에 몰리고도 “내 것이 아니면 모두 빌려온 것”이라며 크게 좌절하지 않았다. 1929년경부터 친구 박진의 집에 기거하였는데, 이 무렵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1930년부터 전국을 떠돌며 방랑하던 중 둘째 부인 황숙엽(黃淑燁)을 만나 서울 자하문 밖 홍지정 92번지 등에 방을 얻어 생활하였다. 박학한 학식으로 한약방문을 써주고 자신의 약도 조제하여 복용하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이 부인과의 사이에 2남 1녀를 낳았다. 1938년에는 본부인 원씨와 가족들도 상경하여 마포구 공덕동 122번지에서 살았으나 함께 살지는 않았다.

홍사용은 전국의 사찰을 순례하고 불경을 연구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제작한 극본 등에서도 불교에 대한 지식을 엿볼 수 있다. 간헐적으로 『개벽』, 『동명』, 『여시』, 『불교』, 『삼천리』, 『매일신보』 등에 시, 소설, 수필, 희곡 작품을 발표하였다. 일제 말기 이화여전에 출강을 의뢰받았지만 바로 그만두었고, 유랑하는 동안 강경과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일제 강점기말 그는 친일의 글을 남기지 않았고, 일제의 의뢰를 받은 희곡 「김옥균전」은 사상 문제에 걸려 중단되고 주거제한까지 받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하였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송강절인(松岡節人)’이라는 개명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이며 근국청년단(槿國靑年團)운동에 가담하였으나,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되어 그 뜻을 펴지 못했다. 병이 악화되어 1947년 1월 5일 마포구 공덕동의 본부인과 자녀들이 있는 자택으로 돌아가 아들 규선에게 마지막으로 “조선 사람은 조선을 알아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 화장 후 백련사에 안치했다가 이듬해 고향인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묵실에 돌아와 묻혔다. 홍사용의 유택 앞쪽에 현재 노작홍사용문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노작 문학세계의 의의와 현재]

노작 홍사용은 한국 낭만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고 연극인이었다. 한국 근대문학사의 위치로 볼 때 1920년대 초 낭만주의운동의 선두에 섰던 홍사용의 공적은 매우 크다. 홍사용이 주재한 『백조』는 『창조』, 『폐허』와 더불어 1920년대를 대표하는 순수문예동인지 중 하나였다. 『백조』 동인들이 감상적이고 병적인 낭만주의 정서를 보인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의 비탄과 울분의 정서는 국권 상실을 배경으로 한 겨레의 정서를 대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눈물과 비탄의 시인으로 불리는 홍사용은 국권상실과 독립운동의 좌절 속에서 이러한 비애의식을 민족적 차원으로 고양시킨 시인이라고 평가된다. 민요시에 대한 관심에서도 홍사용의 민족주의 사상의 일면을 찾아 볼 수 있으며, 토월회와 산유화회를 조직하여 민족혼을 고취시키고자 왕성한 연극 활동을 하였던 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비를 들여 연극운동을 후원하여 많은 연극을 제작하였고, 직접 희곡 창작과 번역과 번안에도 힘썼다. 창작극이 많지 않았던 1920년대 연극사에서 홍사용은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연극을 꾸준히 하였다는 점에서도 대표적인 연극인이라 평가할 수 있다.

홍사용은 생전에 시집을 내지 않았으나, 1976년 유족들이 시와 산문을 모아 근역서재에서 『나는 왕이로소이다』를 간행하였다. 1985년 김학동 교수가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시들을 정리하여 처음으로 홍사용의 전집을 새문사에서 출간함으로써 홍사용 문학 연구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2000년에 노작기념사업회가 뿌리와 날개사에서 김학동 교수가 편한 전집을 바탕으로 현대문으로 된 전집을 간행하였다.

홍사용의 탄생 100주기를 맞아 화성문화원이 주도하여 노작홍사용문학관을 2010년 3월 개관하였다. 문학관 주변에 노작공원을 조성하고 산유화 극장, 강의실 등의 시설을 갖추어 소규모 연극 공연과 각종 강좌를 개설하여 시민들을 위한 쉼터이자 문화충전소로 자리매김하며, 지역민들과 문학 애호가, 작가 지망생들이 문학적 감수성과 교양을 쌓고 창작 역량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2012년부터 ‘노작문학제’를 개최하여 노작 홍사용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념하는 축제를 펼치고 있다. 2017년 2월 사단법인 홍사용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노작홍사용문학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2018년부터는 ‘노작문학주간’으로 매년 10월 한 주간 다양한 행사들이 노작홍사용문학관 앞 광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민족의 위기 속에서도 민족혼을 드높인 노작 홍사용의 문학세계는 화성을 대표하는 근대 문화의 유산으로서,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는 시민들의 문학공간과 축제의 장을 통해 면면히 이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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