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600477 |
---|---|
한자 | 龍珠寺 上樑文 |
분야 | 종교/불교,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성재 |
문화재 지정 일시 | 1972년 5월 4일 - 용주사상량문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 |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용주사상량문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 |
소장처 | 용주사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
수급처 | 용주사 - 경기도 화성시 용주로 136[송산동 188] |
성격 | 고문서|사찰문서 |
수급자 | 용주사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기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에 있는 용주사의 창건 내력을 기록한 조선 시대 상량문.
[개설]
1790년 정조의 명을 받은 채제공(蔡濟恭)이 용주사 창건을 기리기 위하여 직접 짓고 쓴 상량문으로,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길이 15m, 너비 77.0㎝의 상서로운 구름무늬가 있는 주황색 비단에 묵서(墨書)로 되어 있다.
[제작 발급 경위]
1790년(정조 14) 정조의 최측근이자 남인의 영수인 좌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용주사 건립을 주도하면서 글을 짓고 글씨를 썼다. 원 제목은 「화산 용주사 상량문(花山龍珠寺上樑文)」이다.
[형태]
용주사상량문은 주황색 비단에 묵서(墨書)로 되어 있다. 비단의 앞쪽 가장자리에는 ‘소주직조신서문(蘇州織造臣舒文)’이라는 글귀가 그대로 남아있어 중국 쑤저우[蘇州]에서 생산된 공단(貢緞)임을 알 수 있다. 1790년 황덕순(黃德諄)이 작성한 「(대웅보전 닫집) 원문(願文)」에 따르면 용주사는 현륭원의 원찰로서 ”당시 도배지와 그릇. 취장과 장막, 방석, 깃발, 가마 덮개, 종과 북, 볼복장을 싸거나 불상의 자리에 까는 직물은 모두 궁궐에서 내렸다“고 기록하였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상량문에 사용된 비단도 궁궐에서 하사한 물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 퇴색되지 않고 직물의 한 폭을 그대로 사용하여 양쪽에 식서(飾緖)가 남아 있다. 직물에는 구름무늬를 사용하였는데 여의무늬가 네 덩어리로 뭉쳐진 사합여의형(四合如意形) 구름머리에 ㄷ자형 꼬리가 연결되어 있다.
[구성/내용]
내용은 세 부분으로 서술되어 있다. 첫 부분에서는 부처님의 위덕을 기리고 용주사의 지세를 서술하였다. 이어 정조가 정치를 잘 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을 모아 절을 지으니, 천승(千乘)의 군자로서 불교의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의 삼승(三乘)이 두루 보살펴 주기를 기원하며 절을 짓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중간 부분의 영치기 노래[아랑위포량동, 兒郞偉頌]에서는 ‘바다의 아침 해가 붉게 물드니 마치 신령한 용이 잠에서 깨어 구슬을 가지고 하늘에서 노니는 것 같다’고 하여, 용주사 사명(寺名)의 ‘용주(龍珠)’의 뜻을 풀고, 임금이 해마다 이곳을 지나서 태평성대가 이루어짐을 노래하였다. 마지막에는 상량 이후 절을 잘 유지하여 나라에 재난이 없고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능침을 영원히 보호해 줄 것이며, 아울러 정조가 질병 없이 늘 절에 오고 현륭원에 마음대로 오르내릴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같은 글이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선생문집(樊巖先生集)』권58 상량문 「화산 용주사상량문(花山龍珠寺上樑文)」에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용주사상량문을 쓸 당시 채제공은 70세라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운 비단 위에 진한 먹을 능숙히 사용하였다. 행서(行書)로 쓴 필치에서는 원숙하면서도 넘치는 기운과 속도감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