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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582
한자 兪棨
영어공식명칭 Yu gye
이칭/별칭 무중(武仲),시남(市南),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송양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07년연표보기 - 유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30년 - 유계 진사시 입격
활동 시기/일시 1633년 - 유계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634년 3월 21일 - 유계 승정원 천사가주서(天使假注書)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6년 8월 14일 - 유계 승문원 저작(著作)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36년 12월 14일 - 유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
활동 시기/일시 1637년 2월 20일 - 유계 충청도 임천(林川)으로 정배(定配)
활동 시기/일시 1639년 - 유계 해배(解配)
활동 시기/일시 1639년 - 유계 『가례원류(家禮源流)』 저술
활동 시기/일시 1641년 12월 2일 - 유계 시강원 설서의 직첩 환급
활동 시기/일시 1644년 7월 24일 - 유계 승정원 주서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5년 3월 13일 - 유계 지제교(知製敎)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6년 4월 12일 - 유계 무안현감(務安縣監)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49년 2월 26일 - 유계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49년 6월 16일 - 유계 병조정랑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0년 4월 - 유계 삭탈관작
활동 시기/일시 1651년 9월 2일 - 유계 강원도 영월(寧越)로 이배
활동 시기/일시 1652년 12월 2일 - 유계 해배
활동 시기/일시 1657년 5월 7일 - 유계 효종의 석방 지시
활동 시기/일시 1658년 9월 12일 - 유계 시강원 문학(文學)으로 재기용
활동 시기/일시 1659년 3월 25일 - 유계 대사간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9년 4월 13일 - 유계 동부승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59년 6월 5일 - 유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0년 7월 26일 - 유계 우부승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0년 11월 1일 - 예조참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2년 1월 2일 - 유계 이조참의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3년 1월 27일 - 유계 성균관 대사성을 겸함
활동 시기/일시 1663년 10월 15일 - 유계 도승지로 임명
활동 시기/일시 1663년 11월 5일 - 유계 이조참판으로 임명
몰년 시기/일시 1664년 2월 26일연표보기 - 유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06년 2월 5일 - 유계 문충(文忠) 시호를 내림
출생지 수원부 서촌[현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남성
본관 기계(杞溪)
대표 관직 홍문관 제학|이조참판|주서|무안현감|대사간|동부승지|우부승지|도승지|대사성|이조참의|이조참판|부제학

[정의]

조선 후기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무중(武仲), 호는 시남(市南)이다. 증조부는 진사 유함(兪涵), 조부는 수안군수(遂安郡守)를 지낸 유대경(兪大儆), 아버지는 행예빈시참봉(行禮賓寺參奉) 유양증(兪養曾)이다. 어머니인 의령 남씨(宜寧 南氏)는 호조참판을 지낸 남이신(南以信)의 딸이다. 유계는 4형제 가운데 셋째이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세종대왕의 9대손인 이산악(李山岳)의 딸이며, 유명윤(兪命胤) 등 3남 1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유계(兪棨)[1607~1664]는 1607년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팔탄면에서 태어났다. 1630년(인조 8) 24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입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1634년 명(明)의 칙사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승정원의 천사가주서(天使假注書)로 임명되었고, 1636년까지 가주서·주서·승문원 저작(著作) 등으로 활동하였다. 1636년(인조 14) 9월 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되었는데, 같은 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국왕 인조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이 시기 유계는 주화론을 배척하며 준절한 의리론을 펼쳤다. 이듬해 2월, 소현세자 일행이 청의 심양으로 북행(北行)할 때, 시강원의 관원이었음에도 척화론에 적극 동참하였다는 이유로 배행(陪行)하지 못하고 임천으로 유배되었다. 1639년(인조 17) 해배(解配)되었으나,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은거하였고, 이때 예론서인 『가례원류(家禮源流)』저술하였다. 1641년 12월, 시강원 설서의 직첩을 돌려받았고, 1644년 승정원 주서로 기용되어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 1월 전라도사(全羅都事)로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3월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1646년(인조 24) 4월 무안현감으로 임명되어 처음 외직으로 나갔으며, 2년 뒤에 돌아와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

효종이 즉위하자, 인조의 행장 찬집청 낭청에 임명되었고, 인조에게 '조(祖)'를 올리기 민망하다는 심대부(沈大孚)의 상소에 동조하고 인종(仁宗)이 있으니 '인(仁)' 자를 쓰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다. 같은 해 6월 사간원 헌납으로서 대사헌 조경(趙絅)과 함께 김자점(金自點)의 죄목을 간하여 파직시켰다. 그해 8월 인조의 묘호를 올리는 과정에서 효종의 미움을 사서 낙향하였고, 이듬해 온성으로 유배되었다가 영월로 이배되었다.

유계는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652년(효종 3)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한동안 은거하였고, 1657년(효종 8) 효종의 사면을 받았다. 1658년 9월 시강원 문학(文學)으로 재기용되었고, 이듬해 병조참지로서 비변사의 부제조를 겸하였다. 이어서 대사간·동부승지를 역임하였는데, 송시열과 함께 호포론(戶布論)을 제기하였다. 현종이 즉위한 후, 성균관 대사성·홍문관 부제학·우부승지·공조참의·예조참의·이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는데, 현종 즉위 후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여 3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을 논박하였다. 1663년(현종 4) 3월 이조참판으로 발탁되어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그해 10월 도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 무렵 병이 악화되어 현종으로부터 약물을 하사받기도 하였으나, 1664년 2월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고금의 치도(治道)를 논하면서 자신의 정치사상을 개진한 『강거문답(江居問答)』을 저술하였고, 말년에는 강목체의 『여사제강(麗史提綱)』을 저술하여 노론의 고려사 인식을 보여주었다. 예론에 밝아 예송에 깊이 참여하였고, 주자의 『가례(家禮)』를 기본으로 하여 『의례(儀禮)』·『주례(周禮)』 등의 내용을 뽑고 주를 붙인 『가례원류(家禮源流)』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문집으로는 『시남집(市南集)』이 있다.

[묘소]

묘소는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와초리 산 96-1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4년 3월 현종은 상례에 쓸 제물을 하사하였고, 4월에는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1702년(숙종 28) 숙종은 유계의 증직을 허락하였으며, 1706년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유계를 기리는 서원으로는 임천의 칠산서원(七山書院), 무안의 송림서원(松林書院),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등이 있다. 칠산서원의 장판각에는 유계의 저술인 『가례원류』와 『시남집』의 목판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무안의 송림서원은 1706년에 유계를 추향(追享)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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