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홍원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766
한자 洪元植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혜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77년 10월 13일연표보기 - 홍원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홍원식 항일 의병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07년 - 홍원식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5일 - 홍원식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시위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19년 4월 15일연표보기 - 홍원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홍원식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4월 15일 - 제암리사건
출생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지도보기

[정의]

경기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사건으로 순국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홍원식(洪元植)[1877~1919]은 1877년 10월 13일 태어났다. 본적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현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이다. 홍원식은 군인으로서 1907년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대결하다가 부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이후 제암리에서 김성열(金聖烈)·안종후(安鍾厚)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5일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강태성(姜太成) 등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천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고창한 대규모의 시위였다. 일본 경찰은 시위 군중과 충돌하여 무차별 발포를 하였고, 3명이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이 일본인 순사부장에게 돌을 던져 처단 하기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수원으로 대량 증파되어 보복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919년 4월 15일 일본 보병부대는 발안 장에서 2㎢ 떨어진 인근 제암리에 가서 주민을 참살하고 마을에 불을 질러 기독교예배당과 천도교 교회당을 포함한 가옥 28채를 불태웠다. 또한 일본군 보병 79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 이하 보병 11명은 경찰관과 협력하여 군중을 해산하고 홍원식을 비롯한 주민 20여 명을 교회당에 소집시켰다. 아리타 중위는 훈계를 한 뒤 교회당을 나갔고, 교회당 입구에서 병사들이 총을 발사하고 방화하였다. 홍원식은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묘소]

제암리사건을 목격한 생존자 전동례(田同禮)와 김순이(金順伊)의 증언에 따르면, 마을 사람들이 예배당에서 희생된 이들의 유해를 거두어 발안 장터 뒷산에 묻었다고 한다.

[상훈과 추모]

제암리사건으로 순국한 사실이 확인되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