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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432
한자 金敎獻
이칭/별칭 백유(伯猷),무원(茂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철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8년 7월 5일연표보기 - 김교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5년 - 김교헌 정시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92년 10월 6일 - 김교헌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8년 - 김교헌 독립협회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월 - 김교헌 대종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김교헌 『신단실기(神檀實記)』 저술
활동 시기/일시 1916년 8월 15일 - 김교헌 대종교 2대 교주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9월 20일 - 김교헌 『신단민사(神檀民史)』 출간
몰년 시기/일시 1923년 12월 25일연표보기 - 김교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김교헌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옛 수원군 비봉면] 구포리지도보기
활동지 대종교 교단 -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활동지 대종교 총본사 - 북간도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
묘소 대종교 삼종사 묘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용성진 청호촌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종교 2대 교주

[정의]

경기도 화성 출신의 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경주. 조부는 동지성균관사·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한 김정집(金鼎集)이며, 부친은 고종대에 공조판서·사헌부 대사헌·한성부 좌윤을 역임한 김창희(金昌熙)이다. 모친 풍양 조씨(豊壤 趙氏)는 판관을 역임한 조희필(趙熙弼)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교헌(金敎獻)[1868~1923]은 1868년 7월 5일 경기도 수원군 비봉면에 있는 외할아버지 조희팔의 집에서 태어났다. 서울 박동(礴洞)에서 성장하였으며, 1885년 18세에 정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88년 4월 14일 시강원 문학, 1889년 3월 1일 시강원 사서, 1892년 8월 10일 이조 정랑을 거쳐 1892년 10월 6일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는 등 순탄한 관직 생활을 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민권운동과 계몽운동을 하였다. 1898년 11월 5일 고종에 의해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자, 대표위원으로 선정되어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다.

독립협회 해산 이후에는 1906년 10월 1일 동래 부윤에 임명되었고, 재직 중 비밀 단체인 신민회(新民會) 회원들과 교유하였다. 1908년에는 애국계몽단체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가입하여 찬무원(贊務員)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1월 나라가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 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조(國祖) 단군을 구심점으로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을 전개한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1910년 10월에는 최남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 합류하여 현채(玄采)·박은식(朴殷植)·유근(柳槿)과 함께 고문 간행 사업을 진행하였다.

대종교 입교 후에는 주로 교단의 역사와 단군 관련 기록을 정립·출간하는 작업을 하였다. 1911년에 유근과 함께 단군 기록 모음집 『단조사고(檀祖事攷)』의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1912년에는 대종교 주요 경전 『삼일신고(三一神誥)』의 편수 겸 발행인을 맡았다. 1914년에는 단군 관련 문헌 자료를 모아 대종교의 역사적 연원 및 민족의 뿌리 사상을 밝힌 대종교 경전 『신단실기(神檀實記)』를 저술하였다. 1916년 8월 15일 나철의 뒤를 이어 대종교 제2대 교주 자리에 올랐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1917년 북간도 화룡현(和龍縣)으로 교단을 옮기고, 간도 지역 한인들을 대상으로 교세 확장과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3월 11일 길림성(吉林省) 안도현(安圖縣)에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12월에는 대종교 교인을 중심으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는 등 1920년 9월 청산리전투의 승리에 일조하였다. 이후 만주 지역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과 교단의 기반이 붕괴하자, 1922년 총본사를 영안현(寧安縣)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겼다.1923년에는 환인이 강림한 상원갑자년(上元甲子年)부터 1894년 갑오개혁까지 민족사를 정리한 역사서 『신단민사(神檀民史)』를 저술하였다.

1923년 대표적 한일투쟁지 밀산(密山)으로 이동 중, 만주지역 한인에 대한 일제의 학살을 목격하고 병을 얻어 12월 25일 사망하였다. 1923년 11월 영안현에서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저술 및 작품]

대표적인 저서로 『신단실기』·『신단민사』가 있으며, 『단조사고(檀祖事攷)』의 편찬을 주도하였다. 또 1898년에 부친 김창희의 문집 『석릉집(石菱集)』을 간행하고, 1900년에 조부 김정집의 문집 『석세유고(石世遺稿)』를 간행하였다.

[묘소]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삼종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국가보훈처에서 2018년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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