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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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綾州靑年會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광철 |
설립 시기/일시 | 1920년 7월 - 능주 청년회 창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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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8월 20일 - 능주 청년회 송석 지회 설립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1년 10월 - 능주 청년회 육영 의숙 설립 |
개칭 시기/일시 | 1924년 12월 - 능주 청년회에서 신흥 청년회로 개칭 |
개칭 시기/일시 | 1925년 1월 - 신흥 청년회에서 갑자 청년회로 개칭 |
최초 설립지 | 능주 청년회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
성격 | 청년 운동 단체 |
[정의]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군 은주면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청년 단체.
[개설]
능주 청년회는 1920년대 화순군 능주면의 청년 운동과 사회단체 설립의 모체가 되었다. 능주면 출신의 많은 활동가들이 능주 청년회를 정치 및 사회 운동의 터전으로 삼아 성장하였다.
[설립 목적]
능주 청년회의 창립 당시의 기록은 주로 언론 보도에 불과하여 구체적인 설립 목적을 파악하기 어렵다. 다만 이후의 활동 사항으로 보아 교육·강연 등을 통한 계몽주의적 활동에 초점을 맞춰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능주 청년회는 공식적인 발족 이전 능주 청년 수양회로 불렸는데 회원이 100여 명에 달할 만큼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했다. 1920년 7월 능주 청년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1921년 8월 20일[8월 15일 창립 기록도 있음]에는 산하에 당시 송석면·도림면[현 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춘양면을 아우르는 송석 지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24년 12월에 자진 해산하여 신흥 청년회로 개칭했다가 1925년 1월에 다시 갑자 청년회로 개편했다.
[역사적 배경]
1919년 3·1 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통치 분위기에서 설립된 여러 청년회와 비슷한 양상으로 발족했다. 토착 유지 집단을 기반으로 태동한 까닭에 대한제국 시기 이후로 능주 지역의 유력 집단으로 떠오른 신안 주씨·능성 구씨·창녕 조씨 등 3대 성씨가 처음부터 능주 청년회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활동 지역도 이전에 능주목 또는 능주군 시절에 단일 행정 구역에 속했던 능주면·도곡면·춘양면·도암면·이양면·한천면·청풍면 등 7개 면을 아울렀다.
[활동 사항]
능주 청년회의 첫 사업은 토론회 개최였는데 첫 주제는 ‘사회 발전에 금전이 지식보다 중한가’였다. 1921년에도 매주 1회에 걸쳐 지역의 농업 문제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강연회와 강습회도 자주 열었다. 1921년 7월에는 경성 유학생 초청 강연회, 8월에는 귀향 학생들에 의한 강연단을 꾸려 8개 면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 강연회는 이듬해 1월에 능주 예배당에서 다시 열었고 호응이 좋아 7월에는 16개 면을 순회했다.
능주 청년회는 창립 때부터 일제의 간섭과 압력을 받았고 재원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재원 마련을 위해 1921년 4월에는 소인극을 열어 모금을 하였고 이듬해 2월에도 소인극 공연을 해 1,000여 원을 모아 육영 의숙의 재원에 충당했다.
교육 사업에도 참여해 1921년에는 능주 예배당에 여자 야학을 개설하였는데, 이듬해 7월에 야학 학생 수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능주 청년회는 또한 유아 교육도 실시했다. 1921년 10월부터는 능주 청년 회관에 육영 의숙을 개설했다. 그 해 11월 육영 의숙의 학생은 70여 명으로 늘었고 교사는 청년회 회원들이 맡았다. 학생 수가 늘자 공간과 시설 확충이 필요했는데 이에 필요한 재원은 소인극 공연의 개최를 통한 수익금 또는 찬조금으로 충당했다.
육영 의숙은 매우 성공적인 사업 중 하나였다. 1922년 3월에는 속성과[1년 6개월 과정] 50명, 본과 50명, 그리고 약간의 보결생을 모집했다. 같은 해 5월에 학생 수는 속성과 98명, 본과 59명 등 157명에 달했고 이에 교사(校舍)도 증축했다. 같은 해 9월 능주 지역 유지 38명이 능주 청년회 후원회를 결성해 육영 의숙 운영기금을 모금하여 1923년 3월 교사 신축과 보통부[속성과 70명, 본과 70명] 외에 고등부 70명, 여자부 50명을 더 선발할 수 있었다.
능주 청년회는 그밖에도 1921년 야구단을 운영하고, 1922년 4월 전남 웅변 대회를 개최하였으며, 1923년 2월에는 물산 장려 운동에도 참여했다. 1923년 3월에는 육영 의숙 야학생들을 중심으로 소년 유한당(少年流汗黨)을 조직하여 근로·근검·절약·경로 등의 의식을 고취했다. 능주 청년회의 활동에 경찰의 간섭이 있었음에도 경찰과 함께 능주면 관내 모르핀 중독자의 색출 작업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평가]
1920년대 전반기에 양산된 수많은 청년회와 계몽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성격에서 궤를 같이한다. 청년회를 이끈 주역들이 능주 지역을 대표하는 중소지주층의 자제였다는 사실도 관련이 깊을 것이다. 실제로 능주 청년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주기풍은 대한제국 시기에 능주군 주사를 지냈고, 주재석은 능주 면장[1933~1936 재임]과 능주 금융 조합장을 역임했다.
반면에 능주 청년회는 사회주의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청년회의 출범을 주도했고 중도에 회장을 지내기도 한 조준기는 1924년 능주 지역을 떠나 광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1920년대 후반 조선 공산당에 깊이 간여했다. 조준기는 1920년대 후반 능주 지역을 비롯한 화순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