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011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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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燦圭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한규무 |
출생 시기/일시 | 1913년 5월 6일 - 정찬규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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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7년 - 정찬규 목포 공립 상업학교 입학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11월 19일 - 정찬규 목포에서 상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항일시위 전개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3월 20일 - 정찬규 광주 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언도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6월 21일 - 정찬규 대구 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66년 9월 11일 - 정찬규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정찬규 건국장 추서 |
출생지 | 정찬규 출생지 - 전라남도 화순군 도림면 송정리 |
학교|수학지 | 정찬규 수학지 - 전라남도 목포부 북교동 193번지 |
활동지 | 정찬규 활동지 - 전라남도 목포부 북교동 193번지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광주 학생 운동 |
[정의]
일제 강점기 화순 출신의 독립 운동가.
[활동 사항]
정찬규(鄭燦圭)[1913~1966]는 전남 목포 공립 상업학교에 3학년 재학 중 1929년 11월 3일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같은 학교 최창호(崔昌鎬) 등과 수차 회합하여 목포에서도 같은 달 19일에 동조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 폭압정치 절대 반대”, “피감금 학생 즉시 탈환”, “치안 유지법 철폐”, “피압박 민족 해방 만세”등이 적힌 격문 약 1,500매를 등사판으로 제작하였다.
이들은 11월 19일 정명 여학교(貞明女學校) 앞에 집결하여 학생들에게 격문을 살포하면서"싸우자 2천만 동포여! 광주 학생을 탈환하라. 우리는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며 시위 행진을 벌이다가 다른 주동 학생 21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30년 3월 20일 광주 지방 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언도받았으며, 같은 해 6월 21일 대구 복심 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66년 9월 1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3년 건국 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