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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473
한자 密陽 三浪津 後曹倉 遺址 碑石群
영어공식명칭 The head-stone in rowing shed of Miryang-Samrang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61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변광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66년연표보기 - 부사 김후인대 유애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12년연표보기 - 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39년연표보기 - 차사원겸도호부사 조공운표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43년연표보기 - 관찰사 조상국인영조폐리정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57년연표보기 - 부사 이후정재 선정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건립
건립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순찰 김공세호 영세불망비 건립
문화재 지정 일시 2006년 1월 12일연표보기 -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3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6월 29일 -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612 지도보기
원소재지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 -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612
성격 비석군
양식 석비|철비
관련 인물 김인대|홍리간|조인영|조운표|이정재|이철연|김세호
재질 석재|철재
크기(높이, 너비, 두께) 49㎝[부사 김후인대 유애비 가로]|23㎝[부사 김후인대 유애비 세로]|131㎝[부사 김후인대 유애비 높이]|41㎝[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 가로]|10㎝[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 세로]|120㎝[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 높이]|37㎝[관찰사 조상국인영조폐리정 영세불망비 가로]|3.5㎝[관찰사 조상국인영조폐리정 영세불망비 세로]|135㎝[관찰사 조상국인영조폐리정 영세불망비 높이]|35㎝[차사원겸도호부사 조공운표 영세불망비 가로]|3.5㎝[차사원겸도호부사 조공운표 영세불망비 세로]|119㎝[차사원겸도호부사 조공운표 영세불망비 높이]|30㎝[부사 이후정재 선정비 가로]|15㎝[부사 이후정재 선정비 세로]|105㎝[부사 이후정재 선정비 높이]|42㎝[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가로]|15㎝[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세로]|114㎝[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높이]|48㎝[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가로]|16㎝[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세로]|116㎝[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 높이]|44㎝[순찰 김공세호 영세불망비 가로]|13㎝[순찰 김공세호 영세불망비 세로]|88㎝[순찰 김공세호 영세불망비 높이]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3호

[정의]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고을 주민을 위하여 업적을 남긴 밀양도호부사와 경상도관찰사를 기념하는 비석군.

[개설]

조선 후기 경상남도 밀양을 비롯한 김해·양산·영산·창녕·현풍 등 6개 고을은 중심지인 밀양으로 세곡을 운반·집합하여 조운을 통해 서울로 운송하였다. 세곡의 운반을 총괄 지휘하는 도차사원(都差使員)은 밀양도호부사였고, 뱃길의 운송 지휘를 맡은 차사원(差使員)은 제포만호(薺浦萬戶)였다.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의 비문의 주요 내용은 조창 운영에 따른 민의 과중한 부담, 고을 주민이 겪는 식량의 어려움, 영세 상인의 과도한 소금세[鹽稅] 부담, 선박의 누수에 따른 불편 등의 문제를 밀양부사와 관찰사가 구제하여 고을민들에게 은혜를 베푼 선정을 기리는 것이다. 비석의 제작 기간은 약 100년 정도이다. 가장 최근의 비석은 1872년 관찰사 김세호가 삼랑포와 연미포의 소금세 석당(石當) 2전의 폐막을 해결한 은혜에 보답하는 글이다.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은 2006년 1월 12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93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건립 경위]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의 건립 경위는 모두 관찰사와 부사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서이다. 건립 주체는 대부분 고을 주민이나 조인영(趙寅永)과 조운표(趙雲杓)의 비는 선청(船廳), 홍리간(洪履簡)의 비는 선주(船主)가 세운 것이다.

부사 김후인대 유애비(府使金侯仁大遺愛碑)는 삼랑진 후조창 창건 당시 밀양부사로 있으면서 후조창 조성을 위하여 애쓴 김인대(金仁大)를 기리기 위하여 1766년(영조 42) 주민들이 건립하였다.

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府使洪侯履簡永世不忘碑)는 1812년(순조 12) 부사 홍이간(洪履簡)이 재임 중 월급을 출연하여 뱃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후조창 선주들이 건립하였다.

관찰사 조상국인영조폐리정 영세불망비(觀察使趙相國寅永漕弊釐正永世不忘碑)는 1843년(헌종 9) 관찰사 조인영(趙寅永)을 기리기 위하여 선청(船廳)에서 건립하였다. 칭송시문에 의하면, 재임 중 조인영은 후조창 운영과 관련된 여러 폐단을 없애기 위한 규정을 만들어 반포하여 폐단이 없어지고, 조선도 규정대로 만들어져 세곡을 싣는 데도 여유가 생겼다고 한다.

차사원겸도호부사 조공운표 영세불망비(差使員兼都護府使趙公雲杓永世不忘碑)는 1839년(헌종 5) 월급의 일부를 출연하여 주민의 어려움을 보살펴 준 밀양부사 조운표(趙雲杓)를 기리기 위하여 선청에서 건립하였다.

부사 이후정재 선정비(府使李侯定在善政碑)는 1857년(철종 8) 밀양부사 이정재(李定在)의 선정을 기리기 위하여 삼랑리 주민들이 건립하였다. 화강석재로 비신과 대좌만 있다. 칭송시문 16자는 많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府使李侯喆淵永世不忘碑)는 1872년(고종 9) 밀양부사 이철연(李喆淵)을 기리기 위하여 삼랑리 주민이 건립하였다. 칭송시문에 의하면 부사 이철연은 소금세의 폐단을 감영에 보고하여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였고, 마을의 집들이 연소된 데 대해 관아에서 비용을 일부 출연하여 집들이 새로 들어서게 하였다고 한다.

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府使李侯喆淵永世不忘碑)는 1872년(고종 9) 월급을 출연하여 조창 관련 잡비와 관련된 폐단을 경감시켜 준 밀양부사 이철연을 기리기 위하여 선주들이 건립하였다.

순찰 김공세호 영세불망비(巡察金公世鎬永世不忘碑)는 1872년(고종 9) 관찰사 김세호(金世鎬)를 기리기 위해 삼랑리 주민이 세운 비이다. 비문에 의하면, 50여 년 전에 김세호의 조부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는데, 이후 김세호가 관찰사로 부임하여 다시 석두세(石頭稅) 2전을 복구하는 등 삼랑진에 은덕을 베풀었다고 한다.

[위치]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하부마을 산기슭 입구의 얕은 물길 앞에 있다. 비석군 바로 앞에는 철로가 터널 입구로 연결되어 있다.

[형태]

부사 김후인대 유애비는 화강석으로 만든 관석과 대석을 갖추고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가로 49㎝, 세로 23㎝, 높이 131㎝이다.

부사 홍후이간 영세불망비는 화강으로 만든 관석과 대석을 갖추고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가로 41㎝, 세로 10㎝, 높이 120㎝이다.

관찰사 조상국인영조폐리정 영세불망비는 철비로 관과 비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비신의 크기는 가로 37㎝, 세로 3.5㎝, 높이 135㎝이다.

차사원겸도호부사 조공운표 영세불망비는 철비로 관과 비신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가로 35㎝, 세로 3.5㎝, 높이 119㎝이다.

부사 이후정재 선정비는 화강석으로 비신과 대좌만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가로 30㎝, 세로 15㎝, 높이 105㎝이다.

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는 화강석으로 관석과 대좌가 갖추어져 있고, 비신의 크기는 가로 42㎝, 세로 15㎝, 높이 114㎝이다.

부사 이후철연 영세불망비는 화강석으로 관석과 대좌를 갖추고 있고, 비신의 크기는 가로 48㎝, 세로 16㎝, 높이 116㎝이다.

순찰 김공세호 영세불망비는 화강석으로 만든 비로 관석은 사라지고 대좌만 있으며, 비신의 크기는 가로 44㎝, 세로 13㎝, 높이 88㎝이다.

[현황]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은 6기의 석비와 2기의 철비로 구성되어 일렬로 세워져 있다. 포구로 가는 길은 지금의 접근 도로와 달리 조선 후기 당시는 현재의 비석 자리에서 왼편 기슭을 넘어가면 강변에 삼랑포구가 있었다.

[의의와 평가]

밀양 삼랑진 후조창 유지 비석군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포의 조창과 고을민을 둘러싼 민원 및 문제들을 해결한 지방 관료의 선정을 살필 수 있는 금석문 자료이다. 타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철비가 2기 남아 있는 점도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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