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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38
한자 六二五戰爭
영어공식명칭 Korean War
이칭/별칭 한국전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6월 25일연표보기 - 6·25전쟁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3년 7월 27일연표보기 - 6·25전쟁 종결
성격 전쟁

[정의]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경상남도 밀양시를 비롯한 한반도 전역에서 벌어진 남한과 북한의 전쟁.

[개설]

6·25전쟁 당시 경상남도 밀양은 비격전지였다. 전투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피난민 유입, 청년들의 전쟁 동원, 민간인 학살 등 전쟁으로 인한 상흔은 깊게 남아 있다.

[역사적 배경]

1948년 체제를 달리하는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후, 북한 주둔 소련군은 1948년 12월까지 철수하였고, 미군은 군사 고문단 500명을 잔류시키고 1949년 6월에 철수하였다. 북한은 공개적으로 남한에 통일 방안을 제안하는 한편, 오대산, 지리산, 태백산 등지에 유격 부대를 남파하였다. 6·25전쟁 1년 전인 1949년부터 38선 부근에서는 874회의 크고 작은 전투가 발생하고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하였다.

[경과]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후 전선은 낙동강 유역까지 밀렸다. 1·4후퇴 이후 밀양을 비롯한 임시수도 부산, 경남 비격전 지역에 많은 피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밀양에도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 1951년 1월 현재 밀양에서 수용 구호를 받고 있는 피난민이 1,000명, 자유 피난민은 1만 5000명에 달하였다. 1951년 12월에 피난 국민학생 330여 명이 밀양의 1개 학교에 수용되어 있었다. 1951년 6월 현재 밀양의 인구는 19만 9247명으로 밀양의 원주민 18만 3140명, 피난민 1만 6077명으로 집계되었다. 종전 직후인 1953년 9월에는 18만 3750명으로 1951년에 비하여 1만 5497명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피난민들이 귀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경상남도 밀양은 일선의 전쟁 지원을 위한 후방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1년 4월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군 간부들이 군 풍기 단속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회의를 밀양에서 개최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10월 21일 밀양의 제7육군병원을 위문 방문하였다. 1951년 10월 밀양과 창녕 지역 제2국민병 소집 대상자 1,300명에 대해 영장이 발부되었는데 약 80%의 응소율을 보였다. 1952년 11월에는 밀양군 산외면 다죽리 거주 청년 한 명이 자진 입대를 요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3년 1월 밀양에도 손가락을 잘라 병역을 기피하는 청년이 있다는 신문 기사도 확인된다.

경상남도 밀양은 비격전 지역이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일상적인 활동이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되었다. 1951년 9월 올림픽에 출전할 우수한 선수를 선발하기 위하여 밀양공설운동장에서 축구대회를 개최하였고, 1952년 4월에는 올림픽 파견 축구 선수들이 밀양에서 합숙 훈련을 하였다. 읍면의회의원 선거가 1952년 4월에, 도의원 선거가 5월에 치러졌다. 내각제 개헌에 찬성한 밀양 갑구의 최성웅 국회의원을 소환하여 규탄하는 밀양군민대회도 개최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자 합동 정견 발표회장에서 정부 비판 연설을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밀양군 상남면 예림리 출신 윤술용[당시 49세]은 1953년 3월 대법원으로부터 ‘언론 자유의 범주 속에 드는 비판 연설’로 판정, 무죄판결을 받았다.

6·25전쟁은 민간인 인명 피해를 동반하였다. 밀양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던 민간인 184명이 밀양 주재 특무대원에 의하여 경상남도 청도군 운문산 골리재 삼밭골에서 학살되었고, 밀양군 삼랑진 송지리에서는 70여 명이 총살되었다. 1950년 8월 밀양군 삼랑진읍 안태리미전리 뒷산에서도 민간인이 학살되었다는 증언이 있다.

[결과]

6·25전쟁이 끝난 뒤 경상남도 밀양시에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희생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비가 건립되었다.

밀양 출신 영령 2,470위를 모신 충혼탑을 2009년 10월 밀양아리랑대공원 내에 설치하였다. 2020년 11월에는 밀양초등학교 출신 전사자 94명의 이름을 새긴 ‘6·25전쟁 참전유공자 명비’를 교정에 건립하였다. 2013년 12월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밀양시가 ‘밀양 국민보도연맹 사건 희생지’ 안내판을 밀양시 삼랑진읍 미전리 산11번지에 설치하였다.

[의의와 평가]

밀양은 6·25전쟁 기간 동안 ‘낙동강 방어선’ 이남에 위치하여 있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진주나 점령을 받지 않아 전투로 인한 ‘직접적인 인적·물적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그러나 밀양의 청년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지역 내에서는 민간인 학살 피해도 발생하여 큰 상흔을 남겼다. 자유와 평화를 위한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일깨워 준 아픈 전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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