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256
한자 鳳儀里
영어공식명칭 Bongui-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경상남도 밀양군 천화산내면 봉의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18년연표보기 - 경상남도 밀양군 천화산내면 봉의리에서 경상남도 밀양군 산내면 봉의리로 개편
변천 시기/일시 1995년 1월 1일연표보기 - 경상남도 밀양군 천화산내면 봉의리에서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로 개편
성격 법정리
가구수 172가구
인구[남/여] 304명[남 148명|여 156명]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봉의리밀양시 산내면의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봉의리의 북쪽과 서쪽으로 청도군 매전면과 접하고 있어 경상남도의 도 경계를 이룬다. 동쪽으로는 가인리가 있으며 서쪽과 남쪽으로 용전리, 임고리송백리와 접하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가라, 봉촌, 양촌 3곳이 있다.

[명칭 유래]

‘봉의리(鳳儀里)’ 지명은 봉촌(鳳村)과 가래의(佳來儀)의 합성에서 비롯되었다. 원래 벌완(伐宛)과 노라 두 마을이 있었으며, 마을이 커지면서 봉촌과 가래의를 비롯한 여러 마을들이 새로 생겨났다.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에 ‘벌원리(伐院里)’와 ‘노라리(蘆羅里)’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 ‘봉의리’ 지명이 수록되었다. 『밀양지명고』에는 봉촌 이름은 마을 앞의 독뫼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에서 명명되었으며 가래의도 이와 함께 만들어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봉의리용전리 일부를 합쳐 경상남도 밀양군 천화산내면 봉의리로 개설되었다. 1918년 천화산내면산내면으로 개칭되어 경상남도 밀양군 산내면 봉의리가 되었다. 1995년 1월 1일 밀양군과 밀양시의 통합에 따라 경상남도 밀양시 산내면 봉의리가 되었다.

봉의리의 취락은 육화산과 구만산 남쪽 산록에 형성되어 있다. 이 중 가라마을은 북쪽의 구만산의 계류천 유역에 형성된 마을이다. 갈대가 무성한 곳을 ‘갈라’로 불러 비롯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일명 구만(九萬)이라고도 부른다. 봉촌은 마을 앞의 독산이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어서 비롯되었다. 16세기 김녕김씨가 입촌하여 세거하였다. 마을에는 1905년(고종 42)에 후손들의 충효열(忠孝烈)을 기리기 위하여 설립한 탁삼재(卓三齋)가 있다. 양촌은 동천 유역의 산록에 있는 마을이다. 옛 지명인 벌원(伐苑)은 ‘벌판’ 혹은 ‘볕말’을 표기한 것인데, 후에 양촌이 되었다. 근대 이후 고성이씨(固城李氏)와 밀성박씨가 입촌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자연환경]

봉의리 북쪽에 구만산[784.2m]이 있다. 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봉의리를 감싸면서 동천 유역 가까이 접근한다. 그 사이에 지방 하천인 봉의천이 흘러 동천으로 유입하는데, 봉의천 유역에 가라마을과 양촌마을이 있다. 리의 남쪽을 동천이 연하고 흐르며 연안에 충적지가 발달하여 있다. 봉의천 계곡은 길이 약 4㎞의 골짜기로 통수골[洞簫谷]이라 부른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172세대, 304명[남자 148명, 여자 15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봉의리의 농업으로는 봉의천이 동천과 합류하는 일대에 벼농사가 이루어진다. 중류의 곡저 분지에는 취락 주변에서 밭 작물이 재배된다. 국도 제24호선이 마을에서 떨어져 지나고 지방도로도 개설되어 있지 않아 교통이 비교적 불편하다.

구만산 남쪽의 통수골계곡에는 높이 약 40m의 구만폭포(九萬瀑布)와 구만골이 있어 풍광이 뛰어나며 등산로로 이용된다. 구만이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9만 명의 백성들이 몸을 숨긴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구만골에는 일제강점기 남석을 캤던 광산이 있었다. 동천 유역도 풍광이 뛰어나 밀양한천테마파크를 비롯한 유원지가 조성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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